강민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이완용 필 행서 사시청일색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그는 붓글씨를 잘 쓴다고 당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글씨를 받고자 보낸 비단과 종이가 수두룩하게 쌓일 정도였다. 조선 방문 '기념 선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인 단체라 할 수 있는 경성서화미술원,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창설에서 깊이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대를 뛰어넘어 칭송받는 '명필'일까. 그보다는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팔아넘긴 '매국노'로 더 기억되는 인물, 이완용(1858∼1926)의 이야기다.
영친왕,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가 함께 찍힌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최근 출간된 책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푸른역사)는 100년이 지나도록 손가락질받는 '문제의 인물' 이완용의 글씨 이야기를 파고든다.
강민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국 근대 서화사의 흐름 속에 이완용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져본다.
강 연구사는 이완용이 '명필'이었다고 하는 당대 소문을 파헤친다.
옛 기록에 따르면 일본 다이쇼(大正·재위 1912∼1926) 일왕은 당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를 통해 이완용에게 글씨를 보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이완용의 글씨는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이완용 필 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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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전신)가 2004년 편찬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에서는 "조화미가 부족"하다거나 "필획에 힘이 없다"고 전한다.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1천여 명의 대표 서화가 정보를 담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는 이완용과 관련, "해서와 행서를 썼다"고만 돼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완용이 나름 붓글씨 실력을 갖추었던 데다가 당시 그의 정치적·사회적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얻은 명성이라고 본다.
이완용이 여러 번 썼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에 대해서는 "바탕이 크건, 작건 글자 배치나 획의 움직임이 거의 같다. 독창성이 별로 없는 셈이다"라고 평한다.
이완용 친일 행적 비석에 남은 신발 자국
(성남=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28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 설치된 이완용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비석에 신발 자국이 남아 있다.
이 비석이 설치된 곳은 이완용의 생가가 있던 자리로 성남문화원은 이완용의 친일 행적을 알려 후대에 역사적 교훈을 전하기 위해 250만원을 들여 이 비석을 설치했다. 2023.11.28 xanadu@yna.co.kr
글씨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사료로 풀어낸 점이 흥미롭다.
이완용이 독립문의 편액(扁額·종이나 비단, 널빤지 등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걸어 놓는 액자)을 썼다는 설에 대해서는 신문 기사, 전기 기록 등을 들어 진위를 따져본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처음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글씨 부문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거나 고서화를 즐긴 수집가로서의 모습 등도 소개한다.
이완용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대한제국 내각에서 쓰던 공문서 용지를 가져다가 1911년 1∼6월의 행적을 기록한 '일당선고일기'(一堂先考日記)를 찾아낸 점은 의미가 크다.
288쪽.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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