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닌 관객 마음 바꾸는 일"…장애아동 공연서 깨달아
"점심시간 신문 한 줄이 바꾼 인생"…직장 사표 쓰고 30대에 무대에 선 사연 눈길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배우 서현철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5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연합뉴스에서 인터뷰하는 배우 서현철. 2026. 3. 5. seva@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연극은 단순히 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무거운 '책임'입니다."
5일 연합뉴스와 만난 배우 서현철(61)은 처음 대학로에 발을 들이던 순간을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목숨을 거는 거창한 무대"를 상상했던 때로 기억했다. 하지만 비장했던 각오와 달리, 그에게 주어진 첫 무대는 장애 아동과 그 가족들을 위한 소박한 공연 '나를 사랑해 주세요'였다.
멜빵바지를 입고 정신연령 7세인 13세 소년을 연기하던 당시, 그는 "연극을 하려면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어 꽤 민망했다고 회상했다. 연출의 지시대로 부자연스러운 몸짓을 하며 서툰 어린이 말투로 대사를 뱉어내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 있던 아이들이 분장실로 몰려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이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그러면 엄마 아빠 힘들어"라며 그를 다독이자, 서현철은 잠시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흐려진 찰나에 똑같이 '아이의 목소리'로 "알았어"라고 답했다.
열연 펼치는 서현철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배우 서현철이 2023년 12월 5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프레스콜에서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3.12.5. jin90@yna.co.kr
서현철이 연극을 시작한 건 비교적 늦은 시기였다. 대기업에서 직장인으로 살다 무대에 섰다. 1980년대 대학에 다닌 그는 "자기 앞길 걱정도 벅찼지만 나라 걱정도 했다"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떠올렸다.
군대를 '도피처'처럼 다녀온 뒤에도 꿈을 정하지 못했고, 경제활동을 위해 취업했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서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뭔가 고민했다"고 돌아봤다.
결정적 계기는 점심시간에 펼친 신문 한 장이었다. 국립극장 문화학교 학생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스스로 계속 잘라냈던 그는 "여기 한번 경험만 해보자"며 문화학교 연극반 문을 두드렸다.
시트콤 '빌런의 나라' 제작발표회서 서현철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지난해 3월 12일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열린 KBS 새 수목시트콤 '빌런의 나라' 제작발표회에서 출연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서현철, 최예나, 오나라, 박영규, 소유진, 송진우. 2025.3.12. jin90@yna.co.kr
발성, 대본 읽기 같은 기본 수업이 재미있었다. 1년간 토요일마다 수업을 들었고, 졸업 공연을 올리며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거다"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는 문화학교 강사로 왔던 극단 '작은신화'의 최용훈 대표를 찾아갔다. "극단에서 받아주신다면 직장에 사표를 내겠다"고 했다.
최 대표는 "다시 생각해 보라"며 돌려보냈지만, 며칠 뒤 다시 찾아온 서현철을 결국 받아들였다. 이튿날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대학로로 향했다.
극단에 들어오자마자 캐스팅이 잡힌 것도 그에게는 '선물'이자 '부담'이었다. 그는 "2∼3년 동안 배역을 못 받은 배우도 있는데 신입인 내가 처음부터 배역을 받았다"며 당시의 부담을 떠올렸다.
JTBC 예능 '듣고, 보니, 그럴싸' 제작발표회
(서울=연합뉴스) 2023년 3월 15일 온라인으로 열린 JTBC 예능 '듣고, 보니, 그럴싸' 제작발표회에서 출연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겸 유튜버 문상훈, 코미디언 이은지, 성우 김보민, 배우 박하선, 영화감독 장항준, 배우 서현철. 2023.3.15 [JTBC 제공]
데뷔하던 무렵인 1995년 한국연출가협회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것도 편치 않은 기억이다. 그는 "상을 받고도 불편했고 '전공이 뭐냐', '왜 시작했냐' 같은 질문에 오랫동안 같은 답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후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 결과 2011년 제6회 골든티켓어워즈 연극 남자배우상, 2024년 제10회 에이판 스타 어워즈 남자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 각인됐다.
예능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에서 아내인 배우 정재은과의 에피소드 등 일상 이야기를 재치 있게 풀어내 '입담계의 레전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배우로서의 '분기점'을 묻자 그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50대까지의 무대는 진정한 연기를 보여주기 위한 긴 연습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진짜 연기'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그의 말에는, 세월의 흔적이 몸에 배어야만 대사 한 줄에도 삶의 고뇌와 깊은 숨결을 담아낼 수 있다는 단단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연극열전5 첫 번째 작품 '사랑별곡'서 고 이순재 배우와 열연하는 서현철
(서울=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배우 서현철(왼쪽)과 이순재가 2014년 5월 7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열전5 첫 번째 작품 '사랑별곡' 프레스콜에서 극 중 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2014.5.7. xanadu@yna.co.kr
그러면서 고 이순재 배우를 떠올리며 "'어, 왔어'라는 짧은 대사 하나에도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후배들이 "연극을 계속해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고 했다.
"나도 지금 버티고 있어. 우리 지금 하는 걸 잘하자. 결과는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거 아니니까."
서현철의 연기는 코믹 연기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가 말하는 코미디는 가볍지 않다. 그는 "희극이나 비극이나 호흡은 거의 같다. 상황과 타이밍이 다를 뿐"이라며 억지로 웃기려는 연기를 경계했다.
그가 직접 쓰고 만든 '채플린, 지팡이를 잃어버리다' 역시 일상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했다. 그는 "일상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큰 걸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며 메모해 둔 장면들을 에피소드로 엮었다.
싱글 와이프'서 매력 뽐낸 서현철-정재은 부부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배우 서현철, 정재은 부부가 2017년 6월 30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7.2. scape@yna.co.kr
최근 출연 중인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해 "영화를 보고도, 호랑이와 얼룩말이 한 배에 타는 장면을 연극으로 어떻게 구현할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 하나만 놓고 퍼펫을 움직이는데 연습할 때는 사람이 더 보이는 것 같다가도 공연이 시작되면 동물만 보인다"며 연극만의 상상력과 약속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작품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아 "세상은 위험하다는 걸 알려야 하므로 아들을 혼내야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유튜브 채널 '맥락 없는 수다 옆집부부'로도 주목받는 그는 "숫자 개념이 없어 부담스럽다"며 "우리가 뭘 대단한 걸 했다는 생각보다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답했다.
"좋은 사람이면 더 좋고, 아니면 그냥 배우를 하는 재밌는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phyeons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