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고 안락한 삶 내려놓고
억압받는 이들 곁에 선 선교사
삼일절 맞아 건국훈장 추서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증손녀인 로라 아펜젤러가 1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감사인사를 전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마당 한쪽엔 김치통이 있었고 한국 음식을 즐겨 드셨어요. 한국교회는 증조부의 자랑이었습니다.”
1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천영태 목사)에서 만난 헨리 닷지 아펜젤러(1889~1953) 선교사의 증손녀인 로라 아펜젤러 스가릴리아는 증조부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로라 아펜젤러는 “증조부를 생각하면 기독교가 사회의 모든 문제 앞에서 어떻게 은신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며 “한국을 선교지가 아닌 고향으로 여겼던 닷지 아펜젤러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했다”
고 덧붙였다. 한국은 그에게 사역지가 아닌 삶의 자리였던 셈이다.
이날 제107주년 3·1절을 기념해 닷지 아펜젤러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수훈을 기념한 감사예배가 진행됐다.
닷지 아펜젤러는 구한말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헨리 G 아펜젤러(1858~1902)의 아들이다. 한국에서는 아버지 아펜젤러가 더 널리 알려졌지만 닷지 아펜젤러 역시 탄생부터 죽음까지 한국 곁을 지킨 선교사이자 교육자, 독립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헨리 닷지 아펜젤러(뒷줄 왼쪽)가 1914년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 국민일보 DB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으로 귀국해 미국 프린스턴대와 드류신학교, 뉴욕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1917년 미국 북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떠나 일제 탄압이 번뜩이는 어두운 시절의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는 1920년 배재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한국 독립과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일본 천황을 비판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 가능성을 발언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교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족 교육을 이어갔다. 1940년 학생들에게 독립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는 본토가 아닌 하와이를 택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와이 호놀룰루제일감리교회에서 목회자로 지내며 한인 사역을 이어갔다.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논설과 연설을 통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닷지 아펜젤러가 1941년 하와이의 '더호놀룰루에드버타이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침략정책 및 한국 지배정책을 비판하는 내용. 배재법인 제공
광복 이후 귀국한 뒤로도 한국을 향한 그의 헌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제사회에 한국의 자주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역할을 감당했다.
1947년 1월 호놀룰루로터리클럽연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정부도, 러시아의 정부도 아닌 한국의 정부에 의해 민주주의적으로 통치되기를 원한다”며 “하나님 그렇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듯 외쳤다. 강대국의 이해가 교차하던 시기 그는 끝까지 한국인의 처지를 대변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위원회 총책임자로서 전쟁고아와 피란민을 위한 구호 활동으로 헌신했다. 닷지 아펜젤러는 구호활동 중 과로로 숨지기 전까지 한국교회와 한국을 사랑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안장됐다.
이날 예배에서 천영태 목사는 “그는 3·1운동 당시 배재 학생들을 지지하며 거룩한 용기를 선택한 인물”이라며 “그의 삶이 오늘 우리 교회의 기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