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가중2리 ‘나무숲교회’ 정재윤 목사
경로당 화이트보드엔 ‘도움 요청’ 목사 번호
전등 갈기부터 병원 동행까지
80년 만의 첫 바다 구경, 서울 나들이도 함께
충북 청주 가중2리경로당 화이트 보드에 6일 적힌 정재윤 나무숲교회 목사의 이름과 전화번호.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충북 청주시 남일면 가중2리. 야트막한 언덕길이 끝나는 지점에 마을이 나온다. 주민 40여가구 대부분이 70~90대 어르신인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6일 이 마을 경로당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였다. 마을 공지사항 옆에 큼지막하게 적힌 문구 하나가 시선을 붙잡는다.
“경로당 도움 요청 시 정재윤 목사 010-XXXX-XXXX.”
마을 이장도, 관할 면사무소 공무원도 아닌 인근 나무숲교회 정재윤(43) 목사 번호다. 마을 어르신들은 집에 전등이 나가거나 몸이 아플 때, 심지어 TV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을 때도 이 번호를 가장 먼저 누른다. 오균자(86) 할머니는 “동네에 젊은 목사님이 들어온 뒤로 걱정이 없어졌다”며 “뭐 해달라 전화하면 맨날 웃으며 달려오니 참 예뻐 죽겠다”고 웃어 보였다.
오균자(왼쪽) 할머니가 6일 충북 청주 가중2리경로당에서 정재윤 나무숲교회 목사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1000원의 ‘자존심 비용’... 마음의 문 열다
정 목사는 이날도 어르신들의 안부를 묻는 ‘가가호호’ 심방에 나섰다. 홀로 사는 최영애(82) 할머니 집 마당에 들어서자 강아지 두 마리가 먼저 꼬리를 흔들었다. 최 할머니는 “작년에 목사님이 전기 기술자들을 데려와 노후 전선을 싹 바꿔 준 덕에 불이 날 걱정 없이 편히 산다”고 자랑했다.
정 목사가 “이제 교회도 한 번 나오시라”고 넉살 좋게 권하자, 할머니는 “돈도 없는데 어떻게 가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정 목사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돈은 무슨요, 딱 1000원만 가지고 오셔유.”
아무리 빈손으로 오라고 해도 어르신들은 마음의 짐을 느낀다. 그래서 정 목사는 1000원을 일종의 ‘자존심 비용’으로 정했다. 성탄절이나 명절에 식사를 대접해도 어르신들은 기어코 정 목사 아이들 손에 용돈을 쥐여준다. 정 목사는 “그게 어르신들이 마음 편히 사랑을 받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정재윤(오른쪽) 나무숲교회 목사가 6일 인근 주민 최영애(가운데) 할머니 집을 방문해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외지인 향한 벽, 인사와 아이들이 허물어
여흥 민씨, 밀양 손씨, 중화 양씨의 세 종중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에 외지인이 스며들기란 쉽지 않았다. 2023년 교회를 세우기 8개월 전, 정 목사 가족은 먼저 마을로 이사해 낮게 엎드렸다. 매일 길을 청소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어르신들의 이름을 외웠다.
닫혀 있던 마을의 문을 연 결정적 계기는 정 목사의 세 자녀였다.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며 인사를 건네자 “애들 보러라도 한 번 가야겠다”며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사건도 있었다. 공공근로를 마치고 퇴근하던 중 쓰러진 주민을 정 목사가 심폐소생술로 살려낸 것. 구급대원이 도착하기 전 정 목사가 먼저 도착했다. 휴대전화 영상을 확인하며 필사적으로 가슴을 압박했던 정 목사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 줬다.
80년 만의 첫 바다, 생애 첫 꽃다발
정 목사는 이 마을 사역을 ‘사랑의 둥지’라 부른다. 단순히 종교 활동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생활 밀착형 문제를 해결하는 울타리가 되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서울 강남중앙침례교회(최병락 목사)의 ‘리칭아웃 교회 프로젝트(RCP)’와 손잡고 체계적인 지원 체계를 만들었다.
지원금을 통해 마을 곳곳에 꽃을 심고, 어르신들을 모시고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다. 평생 바다를 본 적 없던 한 할머니는 80년 만에 처음 바다를 마주했고, 생전 처음 꽃다발을 선물받은 어르신은 아이처럼 눈물을 쏟았다. 정 목사는 “교회가 어르신들에게 뜻밖의 ‘처음’을 선물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제 가중2리 경로당의 화이트보드는 단순한 연락처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자녀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는 든든한 ‘마을 아들’의 이름표다. 정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시골 교회 40대 목사는 참 바쁩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우리 마을이 그렇게 따뜻한 숲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재윤 나무숲교회 목사가 6일 충북 청주 예 앞에서 교회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