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1500원을 돌파하면서 세계 선교지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에서 보낸 원화 후원금을 달러로 환전해야 하는 선교사들은 극심한 환차손으로 생계와 사역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사진은 미국 달러화 지폐 모습. 연합뉴스
지구 반대편 남미 볼리비아. 이곳에 파송된 박수영 선교사 가정의 장바구니는 근래 날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있다. 생필품조차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결국 카트에서 빼내는 게 일상이 됐고, 외식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당장의 생계를 넘어 현지인들을 섬기던 장학과 구제 등 핵심 사역마저 부득이하게 보류하거나 규모를 줄이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보내오는 원화 후원금은 예전과 다름없는 상태다.
선교지에서의 삶이 이토록 팍팍해진 이면에는 1500원 선을 넘나들고 있는 원·달러 환율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원화 기준으로 보내는 후원금을 달러 가치로 바꾸면 환차손이 발생하는 만큼 실제 손에 쥐는 금액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박 선교사는 2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선교지에서 환율은 단순한 경제 지표를 넘어 오늘 식탁에 올라갈 메뉴가 바뀌고 아이들의 교육비를 걱정해야 하는 생존의 무게”라며 “이전과 비교하면 실질적인 후원금이
30% 이상 줄었다”고 전했다.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원·달러 환율이 지난 19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중동 전쟁 여파로 유가와 물가까지 오르며 이중·삼중고를 겪는 선교사들도 적지 않다. 캄보디아의 황반석 선교사는 “한국보다 캄보디아 기름값이 더 비싼 상황”이라며 “최근 휘발유가 ℓ당 4000리엘에서 5400리엘로 올랐고, 경유는 배 이상 올랐다”고 설명했다. 치솟은 유류비 탓에 장거리 이동이 부담스러워지면서, 그간 대면으로 진행하던 한인 선교사 모임도 온라인 회의로 전환된 상태다.
환차손과 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사역에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 같은 캄보디아의 임래청 선교사는 매달 600~700달러가 부족해졌다. 고장 난 우물 펌프를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해 6개월째 이웃집에서 물을 구걸해 쓰고 있다는 임 선교사는 “우리 부부의 한 끼 외식비가 현지 아이들의 일주일 간식비라는 사실을 알기에 1년에 외식 한 번 하지 않는다”면서도 “환율 급등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예배에 나오는 150명의 아이에게 간식을 못 주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사역의 축소가 현지 취약계층의 직접적인 위기로 직결되는 곳도 있다. 치안 붕괴와 물가 폭등이 겹친 아이티가 대표적이다. 아이티 시티슬레이의 빈민가 아이들 120여명을 돌보는 김혜련 선교사는 환율 급등으로 사역비가 사실상 반 토막 나면서 무료 급식을 주 7일에서 5일로 줄여야만 했다. 갱단이 수입 물품을 통제해 쌀값이 한국의 10배에 달할 정도로 치솟은 탓이다. 김 선교사는 “돌봄의 손길이 끊겨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은 갱단에 차출되거나 성 노예로 팔려 가기도 한다”며 “환율 급등으로 아이들의 생명줄과도 같은 후원금이 반 토막 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선을 돌파한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연합인포맥스에 설치된 모니터에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선교 전문가들은 현재 선교 현장이 직면한 재정적 위기가 IMF 외환위기 때보다 가혹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엔 원화와 함께 선교지 통화 가치도 동반 하락해 현지 구매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인 달러 강세 속에 원화만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나 홀로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에서다. 선교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파송 교회의 기민한 지원과 함께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선교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대흥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사무총장은 “전쟁과 경제 위기가 맞물린 특수한 상황인 만큼,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 파송 교회가 한시적인 특별 후원이나 증액을 검토해준다면 현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 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후원금을 원화 대신 달러로 송금하는 방식도 제안했다.
이번 고환율 고유가 사태를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보잔 제안도 나왔다.
강 사무총장은 “이제는 선교사가 모든 재정을 감당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현지 교단 및 주민들과 협력하는 선교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며 “
선교사가 언젠가 떠나더라도 현지 교회가 스스로 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동반자적 역할로 돌아서야 건강한 선교가 가능하다”
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