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 사사로부터 27년 후 딸 등 주변인물의 공허한 내면 그려
같은 사건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몽유도원도’와 비교하는 재미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c)국립극장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계유정난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높다.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이 한명회 등 심복의 도움으로 조카인 단종의 보좌 세력 수십 명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으로, 2년 뒤 왕위 찬탈의 기반이 됐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강제 선위로부터 다시 2년 뒤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갔다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영화의 인기는 계유정난과 반정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권력을 잃은 어린 왕이 견뎌야 했던 인간적 고뇌와 함께 그런 왕을 포용하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민중의 의리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에 앞서 계유정난을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그 그늘에 가려진 개인의 삶과 고뇌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창극이 있다. 바로 지난 19일 개막한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이하 ‘보허자’,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다. 지난해 배삼식 극본, 한승석 작창, 김정 연출로 첫선을 보여 호평받은 뒤 1년 만에 돌아왔다.
‘보허자’는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27년 후의 이야기다. 수양대군의 바로 아래 친동생인 안평대군은 시·서·화 및 음악에 뛰어난 예술가이자 후원자였으며, 유교와 불교에 통달한 학자로서 주변에 많은 인물이 모였었다.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김종인 등은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냈다. 이에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를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안평대군과 두 아들을 죽이고 다른 가족들은 노비로 삼았다. 또한, 당대 최고의 예술품 수집가였던 안평대군의 장서는 모두 수양대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c)국립극장
이 작품은 안평대군의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무심이 오랜 노비 생활에서 풀려나 옛집 수성궁을 찾는다. 그리고 폐허가 된 수성궁에서 안평대군이 아꼈던 화가 안견과 안평대군의 애첩이었던 대어향을 만난다. 재색을 겸비했던 대어향은 계유정난으로 관노비가 된 후 치욕을 피하고자 스스로 불을 질러 얼굴과 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런 대어향을 안견이 남몰래 거뒀다. 계유정난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무참하게 꺾인 이들은 오랜만에 만나 울분을 토하거나 서로를 위로한다. 그때 안평대군을 기억하는 정체 모를 나그네가 끼어든다.
배삼식 작가는 안평대군의 무덤이 남아 있지 않은 데서 착안해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나그네로 떠돌아다닌다는 상상력을 가미했다. 다만 나그네가 실제 사람인지, 유령인지 애매하다. 그리고 이런 나그네에게는 죽은 수양대군의 혼령이 따라다닌다. 둘은 붉은 줄로 연결돼 있어서 계유정난의 비극을 계속 곱씹게 만든다.
한편 무심의 귀향 소식을 들은 왕실 원찰 대자암의 늙은 비구니 본공(本空)은 방문을 요청한다. 그리고 무심 등은 대자암에서 안평대군이 꿈에 본 정경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게 된다. 계유정난 때 당연히 불탔을 것으로 생각했던 ‘몽유도원도’를 보며 일행은 감회에 젖는다.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c)국립극장
‘보허자’는 수양대군의 권력욕으로 희생된 안평대군을 중심에 두되, 계유정난이라는 참혹한 사건 자체 대신 그 이후에 남겨진 주변 인물들의 상실을 그렸다. 제목의 ‘보허자(步虛子)’는 원래 고려 시대에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조선 시대까지 연주된 궁중음악이다. 원래 도교에서 허공 위를 거니는 신선처럼 불로장생하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허공을 걷는 자’라는 한자의 뜻으로부터 계유정난으로 삶이 파괴되어 현실에 발 디딜 곳 없이 정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번 작품은 연극 ‘3월의 눈’ ‘화전가’ ‘1945’ 등으로 잘 알려진 배 작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격렬한 대립이나 갈등 구조 대신 그 바깥에 있는 인물들의 내면이나 충돌이 지나간 자리의 쓸쓸함을 그리고 있다. 다만 안평대군과 딸인 무심 그리고 애첩 대어향의 이야기는 상당히 불친절하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관계성을 그다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여인의 비극은 조선 시대 권력 싸움에서 희생되는 것이 패배자만이 아니라 싸움과 무관한 약자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붉은 줄로 묶인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형제의 이야기 역시 갈등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다 슬픔과 회환을 담고 있다. 특히 수양대군의 잔혹한 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미친 듯이 피부를 긁어대거나 안평대군을 부르는 모습에서 권력 뒤의 허무함이 크게 부각된다.
이에 비해 안평대군과 안견의 관계는 보다 세밀하게 그려졌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벼루를 훔침으로써 관계가 소원해진 덕분에 계유정난을 피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비틀어 이번 작품에서는 안평대군이 안견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나온다. 또한 ‘몽유도원도’의 경우 기존 연구에선 안견 자신이 평소 깊은 관계였던 대저암에 맡겼을 가능성이 언급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동생에게 죄책감을 느낀 수양대군이 맡긴 것으로 그려진다.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c)국립극장
이 작품은 강렬한 드라마는 없지만, 계유정난 이후 살아남은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관객들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안평대군 역의 김준수, 수양대군 역의 이광복, 무심 역의 민은경, 안견 역의 유태평양, 대어향 역의 이소현 그리고 본공 겸 도창 역의 김미진 등 주요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제 몫을 다한 덕분이다. 이들 배우는 공허함으로 가득 찬 삶을 이어가는 극 중 인물들을 서늘하게 표현했다. 지난해 초연과 비교해 배우들의 동선과 시선을 정리하면서 딸인 무심의 무게감이 커진 것이 눈에 띈다. 주요 배역들 외에 코러스로 나오는 국립창극단 단원들의 앙상블도 작품의 긴장과 이완의 균형을 잡는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보허- 능허- 보허등공”으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무릉도원을 꿈꿨지만, 계유정난 때문에 모든 꿈이 폐허가 돼버린 무상함을 드러낸다.
한편 계유정난과 안평대군의 비극을 다룬 장훈 감독의 영화 ‘몽유도원도’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와 배경이 비슷하고 등장인물이 겹치기 때문에 개봉 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창극단의 ‘보허자’와 두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관객에겐 즐거움이 될 것 같다.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c)국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