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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로 이름 날린 이완용 … 그 또한 친일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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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강민경 지음, 푸른역사 펴냄, 2만2000원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나라를 판 장본인 이완용에게는 '매국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다만 그의 글씨만큼은 당대 최고 명필로 불렸을 만큼 뛰어났다. 조선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그의 글씨를 기념품으로 챙겨 고국으로 돌아갔고, 일왕도 그의 글씨를 궁금해하며 작품을 요구했을 정도다. 이완용은 근대 미술인 단체인 서화미술회·서화협회 등의 창설을 돕고 조선미술전람회 서(書)부 심사위원도 지냈다. 하지만 한국 미술사는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지워왔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인 저자는 신간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를 통해 금기시된 이완용의 필적을 분석한다. 저자는 이완용을 통해 당대 예술계 흐름을 짚으면서도, 그가 누린 '명필'이라는 평가가 얼마나 허울 좋은 것이었는지 파헤친다.

'글씨가 곧 사람이다'는 말처럼 근대기까지 글씨는 인품의 투영으로 여겨졌다. 저자는 일본인과 친일적 지식인의 세평, 권력에 기댄 인기가 이완용이 명필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필적학자 구본진은 이완용의 필치를 두고 "꾸밈이 많다. 가식으로 내면을 포장하고 가벼움이 무거움을 억누르며 경박함이 미적 표현을 압도했다"고 꼬집었다. 당대 서화계의 거목 오세창은 그를 두고 '해서와 행서를 썼다'는 의미인 '서해행(書楷行)'이라는 기록만 남겼다. 능숙함을 뜻하는 '선(善)'이나 '공(工)' 같은 수식어를 배제해 '그냥 좀 썼다'고만 평가한 셈이다.

책은 서예를 매개로 한 이완용의 사대주의와 탐욕을 추적한다. 이완용이 직접 필사한 '일당서초유집'은 그가 존경한 이토 히로부미의 시 수십 수를 필두로 중국 고전들이 잡다하게 섞여 있다. 저자는 이완용이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배경에는 '조선 귀족 영수'라는 권력이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독립문 편액 글씨에 대해서도 비판적 의문을 제기한다. 이완용이 썼다는 1924년 동아일보 보도와 달리, 이완용의 세세한 행적을 기록한 '일당기사'에는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글씨일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한다.

1925년 조선인 부자 순위 2위에 오르고도 교육비 납세를 거부했던 '현금왕'의 면모와 3·1운동을 '망동'이라 비하하며 경고문을 뿌렸던 행적은 그가 휘두른 유려한 붓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저자는 이 책을 낸다고 할 때 주변의 만류가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시경'의 구절을 빌려 답한다. "무를 캐는 이유는 뿌리에만 있지 않다. 뿌리가 썩었을지라도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들면 훌륭한 찬거리가 된다." 책은 이완용의 필적을 통해 권력과 예술이 얽힌 근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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