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수뇌부 22인 정신연구
당시 군의관 기록 들여다보니
공감력 부족·지나친 야심 외엔
'악인' 설명할 성격결함 못찾아
광기는 언제 어디서든 출현
독일 나치 군사 지도자인 헤르만 괴링이 두 명의 군사 경찰관과 함께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뉘른베르크 법정에 앉아 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인 1945년. 나치 전범들이 수감된 독일 뉘른베르크 교도소는 미국 의학계엔 악을 집대성한 표본실과 같았다. 유대인 학살, 노인·장애인 안락사, 강제 수용소 생체실험 등 인류에게 인간의 조건을 되묻게 한 나치의 악행은 하나의 의학적 질문으로 귀결됐다. 거악을 계획하고 실행한 나치 지도자에게서 일관되게 추출할 정신적 결함이 있는가. 과연 나치 수뇌부들은 악을 타고난 자들이었을까.
미국 저널리스트 잭 엘하이가 뉘른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된 나치 수뇌부 22명의 정신 건강을 연구했던 정신과 군의관 더글러스 켈리의 기록을 추적해 쓴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이 같은 의문을 줄곧 부정한다. 나치 수뇌부들은 결코 특별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동 양식은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고 역설한다.
독일 철학자 해나 아렌트가 1960년 홀로코스트 실무 총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지켜보며 제시한 '악의 평범성'과 결론은 같지만 결은 달랐다. 아렌트는 상부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성실하게 수행하는 '수동적 태도'에서 평범함을 찾았다. 켈리는 나치 수뇌부들에게서 평범한 사업가와 같은 모습을 봤다. 그들은 독일 사회에 번진 '나치즘'을 아이템 삼아 권력을 추구하는 '능동적 존재'였다.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잭 엘하이 지음, 채재용 옮김
히포크라테스 펴냄, 1만8000원
저자에 따르면 미 컬럼비아대 의학박사 학위 소지자였던 미 육군 장교 켈리는 종전 후 나치 수뇌부들이 전범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 상태를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공식 임무와는 별개로, 그는 거악을 저지른 수뇌부들에게서 공통된 결함을 추출하기 위한 연구를 병행했다. 이들의 정신적 결함을 파악해 대비한다면, 앞으로 지구상에서 나치와 같은 거악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었기 때문이다. 수개월간 그들의 언행을 비롯해 성격과 감정 체계를 살펴보며 도출한 켈리의 결론은 기대와 정반대였다. 그들에게는 통제되지 않는 야심과 가벼운 윤리 의식, 공감 능력 부족, 악행을 정당화하는 애국심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긴 했다. 하지만 정상 범주를 넘어 그들이 '광인'이자 악의 화신이라는 가설을 입증할 성격 결함이나 정신병리적 증거는 없었다.
특히 나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켈리에게 있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뛰어난 지성을 갖춘 그는 수감자들을 휘어잡는 리더십을 뽐냈다. 아내와 딸에게 극진했으며 동물권에 대한 의식은 지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20세기 최악의 범죄와 직결되는 '인과적 요인'은 없어도 상관관계를 따져볼 순 없을까. 켈리는 핵심 요인을 제시한다. 그들은 권력 획득에 몰두하는 일 중독자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대가로 거액의 배상금에 짓눌린 전후 독일 사회의 피해망상과 편집증적 분위기는 나치즘의 성공을 도왔다. '나치즘'이 득세하기 좋은 환경은 그들에겐 '성공할 기회'였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80년이 흐른 지금. 나치라는 악이 앞으로 절대 출현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권력을 극대화하고 적법 절차를 거추장스러워하는 스트롱맨이 판치는 세계에서 80년 전 켈리의 경고는 시공간을 초월한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이들은 오늘도 민주주의의 권리를 반민주적으로 이용하며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최현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