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로 전락한 심리학 용어들
몇달 전까지 깨볶던 연인
헤어지는 과정 힘들었다고
가스라이팅·강박장애 등
심리학용어 너무 쉽게 사용
사소한 말다툼 과정조차
정신적 폭력으로 과장땐
진짜 피해자의 내면 고통
가볍게 취급될 우려 있어
ChatGPT
얼마 전 차버린 그 사람, 그러니까 '전 애인'의 죄명은 누구에게나 대개 비슷하다. 이별한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심문하듯 '헤어진 이유'를 캐물으면 거의 빠지지 않고 이런 진술이 나오기 때문이다. 헤어진 애인은 사실 "소시오패스"였고 "가스라이팅범(犯)"이었다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깨를 볶던 전 남친, 전 여친은 이별 선언과 동시에 만인 앞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전락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던가('안나 카레니나'). 이 명제를 이별한 연인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변주된다. "사귄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헤어진 이유는 모두 고만고만하다. 소시오패스거나 가스라이팅범이거나."
사귈 때는 '운명'이었다가 헤어지면 소시오패스라니. 정말로 소시오패스가 이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걸까. 신간 '그건 가스라이팅이 아니다'를 쓴 임상심리학자 이저벨 몰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심리학 용어가 무기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심리학 개론을 듣기는커녕 정신건강 대중서를 펼쳐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만난 무고한 상대에게 가혹한 딱지를 붙이며 방어기제로 삼는다는 이유에서다.
언젠가부터 흔하게 사용된 단어 '가스라이팅'이 그중 하나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은 의견이 다른 것과 진짜 가스라이팅을 혼동하고 있다.
1944년 개봉한 영화 '가스등(Gaslight)'에서 파생된 단어인 가스라이팅은, 다른 사람의 현실감각을 무너뜨리는 심리적 학대를 말한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네 기억이 틀렸다' '그런 일은 없었다' '넌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는 너무 쉽게 사용된다. "그건 가스라이팅"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 반박까지도 가스라이팅으로 여겨진다. 책은 가스라이팅이 '없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어느 관계든 진실이 뭔지는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리고, 서로 다르게 느끼는 진실을 통일시킬 방법도 없는 가운데, 모든 상황을 가스라이팅으로 몰아간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가스라이팅이란 말을 너무 쉽게 쓴다. 일주일에 그 단어를 한 번은 듣지만, 내 경력 전체를 통틀어 진짜 가스라이팅은 다섯 번 정도밖에 없었다."
단어 '소시오패스'의 빈번한 사용도 심판대에 오른다. 소시오패스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의 진단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건 가스라이팅이 아니다
이저벨 몰리 지음, 문가람 옮김
글항아리 펴냄, 2만1000원
소시오패스라는 진단을 받으려면 △법을 반복적으로 어겨 범죄를 저지르고 △목적 달성을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 착취를 서슴지 않으며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쉽게 짜증을 내고 공격적으로 변하며 △자신과 타인의 안전에 무관심하고 △태만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고 △타인에게 해를 끼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7대 기준 가운데 '3개 이상'에 해당해야만 한다. 심지어 3가지 기준이 사춘기 때부터 나타나야 '진정한' 소시오패스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그 사람이 갑자기 소시오패스일 리는 없다. 사춘기 이후 이러한 패턴이 없다가 우리가 연애할 때 갑자기 소시오패스가 되는 일도 없다. 농담이지만, 그것보다도 전 연인이 우리를 그렇게나 빨리 잊는 것보다 더 소시오패스적인 게 있을까?"
다음은 강박장애다. 굳이 연애사가 아닐지라도 강박장애는 모두에게 자주 붙는 '병명'이다. 강박장애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생각과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충동을 뜻하는 강박사고, 또 반드시 뭔가를 수행해야 한다고 느끼며 행해지는 강박행동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진짜 강박장애가 되려면 심각한 고통과 시간의 소모로 인해 일상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여야 한다. 이달에 월세를 냈나 안 냈나, 외출 전에 가스불을 껐나 안 껐나를 걱정하는 건 그냥 '꼼꼼한 성격'이지 강박장애라고 볼 수 없다는 것. 저자는 레드 플래그, 러브 보밍, 양극성장애, 경계 침범, 경계선 성격장애 등의 심리학 용어가 무기화되는 현실도 꼼꼼히 살핀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가스라이팅으로 고통받은 피해자와 소시오패스처럼 행동했던 가해자가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자의로 타인을 분석하면, 정말로 질병을 앓고 있거나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거나 실질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의 고통이 가벼워지거나 가려진다는 논쟁적인 주장을 펼친다.
가해자라는 낙인이 이렇듯 쉽게 찍히면 진짜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에 숨는다. 사소한 말다툼까지 폭력으로 은유되면 구조적 학대와 정신질환으로 내면이 파괴된 사람의 고통까지 가볍게 취급된다. "얼핏 들은 심리학 용어로 타인을 악마화하는 순간을 경계하라"고 책은 말한다. 원제는 'They're Not Gaslighting You'.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