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자연재해·전염병 등
재앙 수준의 비극 겪은 인류
피로 물든 폭력의 역사에도…
폐허 위에 다시 새 문명 건설
"인간은 아포칼립스의 후손"
2015년 인도 데칸대 고고학부 발굴팀과 서울대 의과대학 법과학연구소가 함께 발굴한 하라파 인더스 문명 시기 주민의 유골. 데칸대 고고학부
집단에도 공유되는 무의식이 실재한다면 인류는 대개 비슷한 불안에 잠겨 있을 것이다. '세계가 끝장나고 있다'는 섬뜩한 예감 말이다. 자연이 내린 재앙과 인간이 시도한 전쟁이 일상처럼 학습되고 누적되니, 인간은 정말이지 실패한 것만 같다.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대파국이 진짜로 오는 게 아닐까.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그래서 언제나 미래의 일로 치부됐다. 하지만 신간 '아포칼립스'의 저자는 아포칼립스를 좀 다르게 정의 내린다. "언젠가 아포칼립스가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아포칼립스의 후손이다. 세계의 종말 이후를 우리는 이미 살아가고 있다."
고고학을 렌즈 삼아 역사의 편린을 들추며, 인류가 아포칼립스를 겪은 '생존자'임을 일깨우는 책이 출간됐다. 그 시작은 북해의 도거랜드 해수면 상승 일화에서 시작된다.
7000년 전 거룩한 풍요의 땅 도거랜드는 주민들에게 모든 걸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닷물은 마침내 호수에 이르렀고, 독한 소금물이 흘러 들어왔다. 식물은 서서히 전멸했고, 먹이를 섭취하지 못한 초식동물과 초식동물을 사냥하지 못한 육식동물이 죽어나갔다. 바다는 육지를 집어삼키는 포식자였다. 그들은 몰랐겠지만, 아무리 천천히 진행됐을지언정 해수면 상승 높이는 무려 120m였다. 그게 바로 영국 동부와 네덜란드를 잇던, 지금은 사라진 땅 도거랜드다.
세상이 두 번째로 끝장났던 때가 있으니, 4000년 전이었다. 이전의 아포칼립스는 너무 많은 물 때문이었지만, 이번엔 너무 적은 물이 문제였다. 비가 오지 않으니 저수지가 텅 비고, 여름의 몬순과 겨울비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작물 수확이 불가능해졌다.
아포칼립스
리지 웨이드 지음, 김승욱 옮김
김영사 펴냄, 3만2000원
농촌에 머물다간 일가족이 굶어 죽을 판이니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공공장소를 거처로 삼았고 거리는 쓰레기로 덮였다. 폭력과 질병이 도시를 먹어치웠다. 넉넉했던 도시의 자원이 줄자 교역이 멈췄다. 사람들은 이윤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걸 보존하기로 했다.
책이 주목하는 당대의 도시는 현재 파키스탄 지역의 고대 도시 하라파다. 아이의 두개골이 책의 중심에 선다. 당시 무덤가의 죽은 아이 두개골을 조사하니 뒤통수 왼편에 금이 가 있었다. 누군가의 '타격'으로 사망한 증거였다. 아포칼립스 이전의 공동묘지에선 '박살 난' 두개골의 수가 전체 시신의 4%였지만, 아포칼립스 이후엔 절반이 넘었다. 식량 부족에 따른 압박과 스트레스, 이로 인해 무너진 시민의식, 확대된 불평등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으리라고 저자는 쓴다.
중세 흑사병도 아포칼립스의 대표 사례다. 고열, 구토, 기침, 토혈, 피부의 검은 농포, 림프절 비대의 증상이 이어지면 보통 3일 안에 사망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환자들을 외면했고, 심지어 부모조차도 죽어 가는 자식을 돌보지 않았다. 일가족이 죽어도 시체를 묻거나 그들을 애도할 이들이 없었다.
이처럼 책은 인류사의 아포칼립스를 차례대로 조명한다. 하지만 아포칼립스가 벌어진 사건 자체의 비극을 넘어서는 힘이 이 책에서 감지된다.
흑사병이 휩쓴 유럽에선 노동계급의 불평등이 흑사병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개선됐다. 흑사병이 사그라진 뒤 지배층이 억압적인 사회체제로 돌아가고자 해도 노동계급은 이전의 삶을 거부했다. 완벽한 폐허가 됐던 멕시코시티가 재건을 거쳐 도시로 형성되는 과정, 또 페루 북부의 팜파데모칸 지층을 조사한 결과 폭우와 홍수로 세상이 망해버린 이후에도 '옥수수 꽃가루'가 있었음을 되짚기도 한다. 폐허가 됐지만 결국 사람들은 돌아왔고 팜파데모칸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증거였다.
아포칼립스는 책에서 재정의된다. 아포칼립스는 '한 사회의 생활 방식과 정체감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급속하고도 집단적인 상실'이다. 그러나 인류는 자기 집단의 아포칼립스를 이겨낸 존재들이라고 책은 말한다. 아포칼립스는 두렵고 잔인하며 냉혹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겨낼 것이란 몇 조각의 희망이 책에 숨겨져 있다. 아포칼립스는 파괴의 언어지만, 동시에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