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추사의 그림 수업'
추사와 제자들 작품 한자리에
국보 '세한도' 영남권 첫 공개
문인화 정신·화풍의 확장 조명
김정희의 '세한도'의 일부(국보).ⓒ국립중앙박물관·대구간송미술관
"붓끝이 메마르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1849년 서울의 한 사랑방. 8년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는 제자 허련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칭찬했다. 신분을 초월해 모여든 제자들 앞에서 추사는 꼼꼼한 비평가이자 혁신적인 화가였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독보적인 글씨체로 주목받지만,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해 문인화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대구간송미술관이 7일부터 여는 기획전 '추사의 그림 수업'은 그간 서예에 주로 집중됐던 추사의 예술세계를 회화로 확장해 조명한다. 올해는 추사 탄생 240주년이자 간송 전형필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로, 두 병오년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국보 '세한도'다. 2020년 손창근 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후 박물관 외부로 대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서울과 제주에서만 전시돼 영남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개된다.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제자 이상적의 신의를 담은 이 그림은 문인화의 정수로 꼽힌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메시지가 관객을 맞이한다.
그림의 주인공인 이상적은 역관으로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중일 때도 변치 않고 청나라의 최신 서적들을 구해 보내며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추사는 제자에게 고마움을 담아 세한도를 그려 선물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연경(베이징)으로 가져가 청나라의 문인들에게 선보였고, 그들은 추사의 작품에 대한 존경의 글을 발문으로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나라 문인들이 남긴 발문도 함께 전시된다.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보물).ⓒ국립중앙박물관·대구간송미술관
추사가 추구한 서화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서예 작품 두 점도 눈길을 끈다. '계곡과 산이 끝이 없다'는 뜻의 '계산무진'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와 우뚝 솟은 산의 형상을 글자에 반영해 회화적 미감을 부여했다. '삼십만 그루 매화나무 아래 집'이라는 뜻의 '삼십만매수하실'은 획의 굵기와 삐침에 변화를 줘 유려한 조형미를 더한다. 글자의 획을 산과 물, 꽃의 형상으로 변주한 이 작품들은 서예가 곧 회화라는 그의 철학을 대변하며 추사체라는 파격적인 조형미가 회화적 상상력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추사와 제자들이 나눈 예술적 교감의 기록인 '예림갑을록'을 통해 생동감을 더한다. '예림갑을록'은 1849년 추사가 제자 14명과 함께 연 품평회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다.
추사가 제자들의 작품에 남긴 비평을 통해 그가 추구한 예술관을 볼 수 있다. 특히 비평 대상 24점 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그림 '팔인수묵산수도'가 이번 전시에 공개된다.
이번 전시는 품평회에 참여했던 여덟 제자의 작품도 소개한다. 유숙의 '매화서옥', 유재소의 '죽림괴석'과 '관산한가', 이한철의 '추산원천', 조중묵의 '운계선관'과 '승주심매', 허련의 '제주 망경루'는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추사의 제자들은 문인화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면서도 각자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전시 후반부에서는 추사의 가르침이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 법고창신(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의 경지로 나아갔는지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매화가 있다. 제자들은 스승이 전수한 필법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매화 그림을 그렸다. 조희룡은 역동적이고 화려한 매화를, 김수철은 수채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산뜻한 채색으로 매화를 표현했다. 추사의 제자들은 단순히 스승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화법을 찾아냈다.
추사가 추구한 문인화는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사실주의에 대한 반기였다. 외형을 똑같이 베끼는 기술에서 벗어나, 선비의 사유와 정신을 필묵에 담아내는 격조를 강조했다. 기교를 부리거나 남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의 정신이 그림의 본질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랑 대구간송미술관 책임학예사는 "추사가 제창한 문인화는 당대 가장 래디컬한 예술이었다"며 "과거의 매너리즘을 해체하고 자기 수양을 통해 내면을 발현하는 경지를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추사의 대표 작품인 '세한도'(국보), '난맹첩'(보물), '불이선란도'(보물)는 작품 보존을 위해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세한도'는 오는 5월 10일까지 전시되며, 이후 '난맹첩'이 5월 12일부터 7월 5일까지, '불이선란도'는 6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는 7월 5일까지.
[대구 정유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