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연구소·박물관, 월성서 발굴한 신라 비편 공개
1937·2020년 각각 발견된 2개, 원래 하나로 확인
광개토왕릉비 서체와 유사한 ‘예서’ 글씨여서 관심
경주 월성 수습 비편 2점을 합친 모습. 가로 약 30㎝ 크기다. 연합뉴스
지난 2020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경주 월성 주변을 발굴 조사 중이었다. 경주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 조사과정에서 비편(碑片, 돌비석 조각)이 하나 발견됐다. 수습한 비편은 가로 16.47㎝, 세로 16.58㎝, 두께 13.67㎝, 무게는 약 2.7㎏였다. 비편에는 ‘貢(공)’, ‘白(백)’, ‘不(불)’, ‘天(천)’, ‘渡(도)’ 등의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런데 이 비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주연구소 측은 또 다른 비편 하나를 떠올렸다.
이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일제강점기부터 소작하고 있던 비편인 데 가로 13.62㎝, 세로 11.13㎝, 두께 9.75㎝, 무게는 약 1.23㎏이다. 이 비편에는 ‘存(존)’ 등의 글자가 씌어 있었다. 별도로 비편 뒷면에는 ‘昭和(소화) 一二(일이) 六(육) 二七(이칠) 西月城址(서월성지) 崔(최)’라는 글자를 펜으로 적었다. 이는 1937년 6월 27일에 서월성지에서 수습된 유물이며, 수습한 사람은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직원이던 최남주(崔南柱)였다는 점을 기록해둔 것으로 추정된다.
두 비편을 합치자 깨진 부분이 정확히 맞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두 비편 돌의 원산지를 분석한 결과 모두 경주 남산 알칼리 화강암으로 제작됐음이 밝혀졌다. 두 비편이 하나의 비석에서 분리됐다는 것이다. 각각 반 쪽씩만 남아 있던 글자가 하나로 이어지며 ‘稱(칭)’ 글자도 추가로 확인됐다. 두 비편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글자는 총 16자인 데 어떤 것은 일부만 판독 가능하다.
경주 월성 수습 비편 2점 모습. 사진 제공=국가유산청
경주 월성 수습 비편 2점의 3D 스캔 모습. 사진 제공=국가유산청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소장 임승경)와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윤상덕)은 13일 경주박물관에서 ‘경주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을 특별 공개했다.
공개된 비편은 경주연구소가 지난 2020년 경주 월성 주변에서 수습한 비편 한 점과, 경주박물관이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부터 소장하고 있는 비편 한 점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다. 문제는 이것을 누가, 어떠한 이유로 만들었는지에 쏠렸다.
일단 비편에 사용된 서체는 신라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해서가 아니라 예서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따라 신라사 및 고구려사, 금석문, 서체 등 다양한 방면의 전문 연구자들이 모여 비편의 실물을 살펴보고 향후 연구 방향을 모색하는 ‘월성 서편 수습 비편 전문가 포럼’이 개최되기도 했다.
당시 포럼에서는 지역사 연구자들 간에 다소 의견이 갈렸다. 우선 고구려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비편의 서체가 광개토왕릉비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해 비석의 건립 주체를 신라에 왔던 고구려인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됐다. 즉 예서로 쓰인 신라 금석문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데 반해, 광개토왕릉비의 서체가 예서며, 비편에서 확실하게 판독되는 글자들이 광개토왕릉비에도 확인된다는 점이 이 견해의 주요한 근거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모습. 뉴스1
즉 서기 5세기 고구려의 ‘신라 남정(신라 구원전쟁)’을 뒷받침하는 사료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서기 400년 백제·가야·왜의 협공을 받은 신라의 요청을 받아 원군을 보내 격퇴하고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신라사 연구자들은 서체만으로 건립 주체를 확정하기에는 서체가 특정 시대나 국가 혹은 지역의 전유물로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 비편이 경주 원산지 화강암을 원료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의 건립과 그 내용 작성 주체를 신라인들로 고려해 볼 수도 있다는 견해다.
이번 특별 공개는 오는 8월 17일까지 진행되며 누구나 관람 가능하다. 전시와 단행본에 대한 문의는 경주연구소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