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호르몬은 생명의 진화와 함께 종에서 종으로 전달되고 발전했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존재할 화학물질이 있다면 바로 '호르몬'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르몬은 불멸이다. 안철우 교수가 칼럼을 통해 몸속을 지배하는 화학물질인 호르몬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고 삶을 좀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아드레날린 24'라는 영화가 있다. 킬러가 직업인 주인공은 어느 날 눈을 뜨니 의문의 주사를 맞은 상태였고 한 시간 내에 심장이 멈출 거라는 경고 메시지를 받는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심장이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한다. 악당들과 싸움을 하고 춤을 추고 편의점에서 권총 강도 짓으로 레드불을 잔뜩 빼앗아 마신다. 결국 심장을 뛰게 하려면 에피네프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병원에서 의사를 협박하여 에피네프린 주사를 맞는데 성공한다.
심장이 멈췄을 때 에피네프린을 주사하는 것은 의료 현장에서 흔히 행해진다.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데에는 전기충격을 가하는 물리적인 방법이 있고, 에피네프린을 주사하는 화학적 방법이 있다.
에피네프린 주사는 혈관을 압박하여 순식간에 심장으로 혈액을 보내는 방식으로 멈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이 외에도 천식 발작으로 호흡이 곤란하거나, 알레르기로 아나필락시스 쇼크 상태에 빠지거나, 말벌, 뱀 등에 물려 발작 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에피네프린을 사용한다.
이러한 과민성 쇼크 상태는 비강, 혀, 기도 등 모든 호흡 통로를 퉁퉁 붓게 만들어 질식 상태로 만드는데 이때 에피네프린을 투여하면 기도가 확장되어 숨쉬기가 가능해진다.
또 유아에게 간혹 발생하는 급성 폐쇄성 후두염에도 에피네프린이 사용된다. 급성 폐쇄성 후두염이란 바이러스나 세균이 후두점막에 침투해서 후두가 잔뜩 부어올라 호흡곤란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에피네프린을 분무해서 호흡기로 마시게 하면 기도가 넓어져서 제대로 호흡하게 해준다.
이같은 극적인 효과 때문에 에피네프린은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앞에 언급했던 ‘아드레날린 24’ 외에도 수없이 많다. 필자가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 중에는 드라마 ‘용팔이’에서 주인공이 경찰에 쫓기다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심장마비를 방지하기 위해 허벅지에 에피네프린을 찌르는 장면이 있었다.
또 영화 ‘1987’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려온 의사 오연상이 박종철의 심장이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심장에 에피네프린을 주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박종철은 고문으로 이미 사망한 터라 에피네프린 주사도 그를 살리지 못했다.
이렇게 활발하게 사용하지만 에피네프린은 호르몬이지만 맹독성 약물이기도 하다. 반수치사량이 체중 1㎏ 당 4㎎에 불과하다. 보통 정지한 심장을 살릴 때 투여하는 양이 0.2~0.5㎎ 정도다. 실제로 에피네프린 때문에 의료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고 이것을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른 사례도 있다. 생명을 구하는 약물이지만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약물이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화학물질이 우리 몸 안에서 분비되는 천연물질이라는 점도 꼭 기억해두자. 에피네프린과 마찬가지로 노르에피네프린도 의료에 다양하게 활용된다.
특히 노르에피네프린은 뇌에 강력한 각성효과를 내기 때문에 이것을 강화하거나 억제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약물이 사용되고 있다. 코카인과 메틸페니데이트가 대표적이다. 이 둘은 체내에서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저해로 작용하여 우울증 치료에 사용된다.
노르에피네프린이 분해되는 것을 지연시켜 뇌에 노르에피네프린이 머무는 시간을 더 길게 만들어 기분을 상승시키는 원리다. 노르에피네프린과 더불어 세로토닌까지 함께 재흡수를 억제하는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저해제’ 계열의 약물이 있는데 뇌를 맑게 하는 것은 물론 행복감까지 주기 때문에 효과가 더욱 좋다.
암페타민도 비슷하다. 이 약물은 그 자체로 도파민 및 노르에피네프린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 이 두 호르몬의 재흡수를 억제하는 효과까지 낸다. 또한 시냅스 내의 신경전달물질 수송체의 방향을 바꿔서 신경계 전체에 카테콜아민 신호량을 대폭 늘린다.
그야말로 뇌 전체에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과 에피네프린이 넘쳐 흘러 의욕과 의지가 충만한 상태가 된다. 이러한 효과 덕분에 우울증은 물론 ADHD 환자에게 사용하고, 기면증(충분한 잠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잠이 오는 수면질환), 비만, 만성통증 등에도 사용한다.
특히 ADHD에 암페타민을 사용하면 뇌의 비정상적 발달을 억제하고 지능, 집중력이 높아져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장기 사용에도 큰 부작용이 없다는 연구결과가 있고 특히 어린 나이부터 치료를 시작해야 효과가 좋다고 한다.
노르에피네프린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약물도 있다. 베타β 수용체와의 결합을 차단하는 약물은 녹내장, 편두통, 그리고 여러 심혈관 질환에 사용되고, 알파α 수용체와의 결합을 차단하는 약물은 진정 효과가 있어서 외과 수술시의 마취 강화제, 약물이나 알코올 의존증 치료제로 사용된다.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이 의학에서 활용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은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칠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사실은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삶을 의미하지만, 그 자체로 생명을 소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사실이 삶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