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호르몬은 생명의 진화와 함께 종에서 종으로 전달되고 발전했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존재할 화학물질이 있다면 바로 '호르몬'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르몬은 불멸이다. 안철우 교수가 칼럼을 통해 몸속을 지배하는 화학물질인 호르몬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고 삶을 좀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1910~1930년대, 미국 하버드 의대 신경외과 교수인 하비 쿠싱은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일련의 환자들을 맡게 되었다.
이 환자들은 모두 짧은 기간에 체중이 급격히 불어난 것을 호소했다. 또한 얼굴이 둥글게 부풀어오르고 상체에 지방이 잔뜩 붙었는데 팔과 다리는 앙상했다. 피부에 멍이 잘 들고 살이 찐 부위에 보라색으로 긴 튼살이 생기고 여드름, 색소 침착 등의 피부 문제도 있었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은 남자도 있었지만 여자가 월등히 많았다. 일부 여자 환자들은 얼굴과 가슴에 남자처럼 길게 털이 자란 경우도 있었다. 외모의 변화에 더해 이들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었다. 높은 혈당과 혈압, 약해진 심장, 성욕 감퇴, 그리고 남성의 경우는 무정자증, 여성의 경우는 무월경과 불임이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쿠싱은 뇌하수체나 부신의 분비샘에 종양이 증식하여 어떤 화학물질을 비상적으로 많이 분비하는 것이 원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쿠싱은 이 질환에 ‘다분비샘증후군’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나의 분비샘 기능이 망가졌을 때 다른 분비샘들에서 연쇄적으로 기능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쿠싱이 연구했던 이 질환을 지금 우리는 ‘쿠싱증후군’ 이라고 부른다.
쿠싱의 추측대로 이 병은 뇌하수체나 부신에 생긴 종양에 의해 특정 화학물질이 과다 분비되어 생기는 증상이다. 그 특정 화학물질이 바로 코르티솔, 흔히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물질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스트레스 때문에 쿠싱증후군이 발병할 정도로 코르티솔 분비가 높아지는 경우는 없다. 쿠싱증후군의 발병 원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뇌하수체 혹은 부신에 종양이 생기는 것이다. 아주 드물지만 폐와 유방에 발생한 암세포가 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을 분비하여 쿠싱증후군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내분비기관에 종양이 생기면 종양세포가 증식하면서 호르몬 분비량이 치솟게 된다. 종양의 증식 속도에 따라 증상이 몇 개월만에 심해질 수도 있고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될 수도 있다. 보통 종양을 수술로 제거하거나 방사선으로 제거하면 2~18개월 사이에 모든 증상이 사라지고 외모도 정상으로 회복된다.
종양 이외에 한 가지 원인이 또 있다. 바로 스테로이드 약물의 장기 복용이다. 알레르기, 비염, 천식, 아토피 피부염, 류마티스 관절염, 루프스 등은 염증을 다스리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보통은 용량과 투여기한을 제한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내성이 생겨 약물이 듣지 않는 경우 고용량을 장기간 투여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환자는 점점 살이 찌고 얼굴이 둥글게 변하고 피부가 붉고 약해진다.
약 복용을 중단하면 증상이 곧 사라지지만 원래의 질환을 다스릴 대체 치료제를 찾지 못하면 다시 스테로이드에 기대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쿠싱증후군은 인구 백만명 당 유럽은 1~2명, 미국은 6~8명 정도 발생하는 희귀질환이다. 종양과 암, 만성질환으로 인한 스테로이드 장기 복용이 아니라면 쿠싱증후군이 발생할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우리가 쿠싱증후군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이것이 과도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우리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40~50대에 이르러 비만, 고혈압, 심장질환, 당뇨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첫 번째 원인은 뭐니뭐니 해도 누적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끼치고, 염증을 증가시키고, 면역 시스템을 악화시켜 비만, 당뇨, 고혈압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