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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들과 막장에 머물렀을 뿐"…광부화가 황재형 떠났다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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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리얼리즘 고수한 민중미술 1세대

서른에 태백 향한 뒤 평생 광부화가로

지하막장서 벌인 사투 온몸에 새긴 뒤

탄광·광부·폐광 등 희망·절망 화폭으로

향년 74세…췌장암 투병 중 병세 악화

작업실에서의 작가 황재형.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대규모 회고전 ‘회천’(서울관)을 열었을 당시 공개했던 작업실이다. 전시에 따로 걸린 영상을 다시 촬영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칠흑 같이 검은 탄광의 갱도 끝. 잔뜩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젓가락만 움직이는 무리의 사내들이 보인다. 머리에선 랜턴 빛이 삐져나오고 얼굴에는 숯검댕이 번뜩인다. 앞사람의 쭈그린 어깨너머로 어슴푸레, 입 언저리로 가져간 밥 한 뭉텅이도 보인다. 그림 속 그 장면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작가는 무리 중 한 사람을 가리키며 탁한 목소리로 뜻밖의 한마디를 던졌다. “저들 중 내가 있다.”

넓은 작업실, 하얀 갤러리도 아닌 탄광 속 화가라니. “캄캄한 어둠 속에선 서로의 랜턴 빛에 의지해야 그나마 내 밥이 보인다. 막장에 갇힌 시간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 식사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제 더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다. 작가 황재형이 27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다.

황재형의 ‘식사’(1985). 광부들이 막장에 갇힌 시간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라는 점심시간, 식사 장면을 그렸다. 서로의 랜턴 빛에 의지해야 내 밥이 보인다고 했다. 작가는 화면 상단 오른쪽 끝에 앉은 광부가 자신이라고 일러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는 정통 리얼리즘을 고수한 한국 민중미술 1세대다. 노동현장의 현실을 뼛속까지 겪어내며 산업화의 뒷면으로 밀린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화폭에 옮겨냈다. 또 광부화가이기도 했다. 탄광과는 거리가 먼 1952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지만 서른 살이 되던 1982년 강원 태백으로 옮겨가 30여 년을 탄광촌과 또 그곳 광부들과 함께했다.

중앙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일용노동자로 광부의 길을 자처한 첫 3년은 태백·정선·삼척 등에서 붓·물감 대신 잡은 곡괭이·석탄과 사투를 이어간 시간이었다. 온통 검정뿐인 탄광촌, 말라비틀어진 폐광촌을 문신 새기듯 온몸에 기록한 이후에야 그 짙은 흔적을 화폭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 세월을 두곤 작가는 “탄광 막장에서 순수함과 진정성을 건져내려 노력한 시간”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황재형의 ‘식사’(1985) 중 부분. 오른쪽에 보이는 얼굴이 갱도 안에 있던 작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실 탄광으로 향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대학 재학 중 그린 작품 ‘황지 330’(1981) 때문이다. 1980년 황지탄광에서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낡은 작업복을 그린 이 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제5회 중앙미술대전’(1982)에서 장려상까지 받게 되자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생겼다는 거다. “광부들 삶을 그냥 소재로 쓴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구경꾼, 사기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탄광으로 가자고 결심했다는 거다.

홀몸도 아니었다.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까지 대동했다. 하지만 육체에 덮인 광부로서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낀 채 갱에 들어갔던 게 실명위기를 불렀고, 결국 눈에 심각한 질환이 생겨 퇴출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신에 씌운 광부로서의 삶은 평생 이어졌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열린 황재형의 회고전 ‘회천’ 전경. 나라와 자식에 자신을 내준 은퇴한 어느 광부를 그린 ‘아버지의 자리’(2011∼2013·왼쪽), 안쪽으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탄광촌의 시름을 드러낸 ‘고한’(2011·부분)과 그 틈에 끼어든 환락의 늪을 그린 ‘욕망’(2008)이 차례로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10년대부터는 물감 대신 꺼내 든 독특한 소재인 ‘머리카락’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태백에 있는 미용실이란 미용실에서 모조리 공수받은 머리카락을 캔버스에 덕지덕지 붙인 ‘엄청난 작품’이 차례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도 “생명 순환 논리의 증거물인 머리카락으로 삶의 기록을 담아내는 게 뭐가 특별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랬다.

이 광부화가에게 리얼리즘은 ‘사람 사는 도리’였다.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면 미술은 그저 자기과시일 뿐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광부가 되겠다고 했어도 내가 화가인데 진짜 광부야 됐겠어? 난 그저 그들과 막장에 머물렀을 뿐이야.”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열린 황재형의 회고전 ‘회천’ 전경. 작가의 ‘아버지의 자리’(2011∼2013)에 모델로 나섰던 광부를 머리카락으로 다시 풀어낸 작품 ‘드러낸 얼굴’(2017·왼쪽) 옆으로 역시 머리카락으로 제작한 ‘별바라기’(2016)가 걸렸다. 광부들이 모처럼 한자리에서 포즈를 취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유족은 부인 모진명 씨와 1남 1녀(황제윤·황정아)가 있다. 27일 유족과 작가의 전속화랑인 가나아트는 “췌장암 투병 중이었다”며 “최근 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1호에 차렸다. 발인은 3월 1일 오전 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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