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맛보지 못한 성공…죽음으로 반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술·마약 중독 결핵환자로 짧은 생 마감
이틀 뒤 연인 에뷔테른도 창에서 투신
'텅 빈 눈' 인물화 걸작들 생전엔 홀대
사후 1~2년 뒤부터 가격 수천배 뛰어
비극적 신화 벗겨낸 건 두 연인의 딸
평생 연구자로 미술사에 아버지 복원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잔 에뷔테른의 초상’(1918).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인 잔 에뷔테른을 그렸다. 두 사람은 1917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으나 1919년 비극적인 파국을 맞았다. 그 3년여 동안 모딜리아니가 그린 에뷔테른의 초상화는 26점. ‘텅 빈 눈’과 ‘긴 목’이 시그니처지만 작품에서 에뷔테른의 목은 길지 않다. 자신의 초상화를 본 에뷔테른이 모딜리아니와 주고받은 대화가 자주 오르내린다. “내 얼굴에 왜 눈동자가 없느냐”고 에뷔테른이 묻자 모딜리아니는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다”고 대답했다. 캔버스에 유채, 91.4×73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미국 뉴욕)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화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1920년 1월 24일 서른여섯 살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틀 뒤 새벽에는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1898∼1920)마저 창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이 일은 며칠을 못 넘기고 모든 파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임신 6개월이고 친정집 6층이었대.” “아니야. 만삭이고 친정집 5층에서 뒷걸음질로 뛰어내렸다는군.” “뱃속의 아기는 어쩌고. 너무 안 됐네. 큰딸은 이탈리아에서 자라고 있는 건가?” “이탈리아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고모가 키워준다나. 겨우 14개월이야. 불쌍하게 됐지.”
그들의 연이은 죽음은 가십성 소문을 좋아하는 파리 사람들을 들썩이게 했다. 죽음으로 유명세를 치른 모딜리아니가 남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었다. ‘20세기 초반 독특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모딜리아니가 후대에 이름을 날리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었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밥값 대신 건넨 그림, 식당 불쏘시개로 던져지기도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의 카페 로통드에서 모딜리아니는 시인 장 콕토(1889∼1963)의 초상화를 그렸던 적이 있었다. 그림값으로 5프랑을 받았지만 콕토는 그림이 너무 커서 차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카페에 그냥 두고 갔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보다 더한 사건은 1917년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유일하게 열었던 개인전이 외설 혐의를 받고 폐쇄된 일이다. 어이없게도 누드에 음모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 사유였는데, 이 시기가 보수적인 가치관이 전방위적으로 해체되고 있던 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독 모딜리아니에게만 가혹했던 시대착오적 폭력처럼 보였다. 이 일은 그에게 ‘실패한 작가’라는 낙인을 찍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궁핍했던 모딜리아니가 밥값 대신 식당주인에게 건네준 수많은 드로잉은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기름을 닦는 데 사용됐다. 그가 남긴 캔버스 작품들은 부서진 창틀을 지지하거나 캔버스 천만 잘라 침대 매트리스를 보수하는 데 유용했다. 그의 작품이 당대 파리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구체적인 사실들은 이루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생전에는 거의 팔리지 않던 그의 작품들은 그가 떠난 지 불과 1∼2년 만에 수천 배로 가격이 뛰었다. 화상들이 그의 비극적인 삶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해 “살아선 인정받지 못한 저주받은 천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918년 파리 스튜디오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왼쪽)와 잔 에뷔테른. 두 사람이 생을 다하는 비극을 맞기 두 해 전이다. ‘미술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라는 말을 들을 만큼 모딜리아니의 외모는 출중했다. 그 덕에 모델을 자청하는 여성들이 줄을 섰고, 염문도 끊이지 않았다. 사진을 찍은 이는 미술상 폴 기윰으로 추정한다.
이런 열광이 자극적인 서사를 소비하는 시장의 논리였다면, 미술사적으로 모딜리아니를 온전한 작가의 반열로 끌어올린 것은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연구자’였던 딸 잔 모딜리아니(1918∼1984)였다. 부모를 동시에 잃고 두 살에 고아가 된 아이는 고모의 손에 맡겨져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조차 숨긴 채 성장해야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뒤로는 자신을 버려둔 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 대신 모딜리아니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길을 택했다. 이탈리아 피렌체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평생에 걸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흩어진 서신과 증언을 수집했고 마침내 아버지의 전기 ‘모딜리아니: 인간과 신화’(1958)를 출간했다. 아버지를 둘러싼 왜곡된 사실을 학술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비극적인 신화 속에 박제돼 있던 아버지를 한 명의 온전한 예술가로 미술사 위에 복원해낸 것이다.
그렇게 딸에 의해 모딜리아니에게서 제일 먼저 벗겨진 것은 ‘방탕한 중독자’라는 세간의 자극적인 껍데기였다. 흔히 모딜리아니를 파멸로 이끈 주범으로 지목되던 술과 마약은, 실상 방탕한 유흥이라기보다 처절한 생존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결핵과 합병증의 극심한 고통을 잠시나마 마비시키기 위한 유일한 마취제로 말이다.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모딜리아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도달한 예술적 지점은 비참한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정제되고 순수한 형태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생애 단 한 점뿐인 ‘자화상’(1919) 속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목도리를 정성껏 두른 모습이다. 몸을 파고드는 질병의 냉기와 죽음의 그림자를 꽁꽁 싸맨 옷으로 간신히 막아내면서 그는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자화상’(1919). 세상에 남긴 유일한 자화상이다. 이젤 앞에 앉아 팔레트를 들고 ‘나는 화가’라고 읊조리는 듯하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병약했고 열일곱 살부터 앓은 폐결핵에 끝내 붙잡히고 만다. 스물두 살에 옮겨간 프랑스에서 구사한 ‘독특한’ 화풍은 파리화단과 섞이지 못했고, 팔리지 않는 그림으로 끝까지 가난하고 춥게 살다 갔다. 캔버스에 유채, 100×65㎝. 상파울루대미술관(브라질 상파울루) 소장.
‘자화상’의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극도로 절제한 색채다. 화려한 장식성을 걷어낸 채 흙빛과 청회색으로 가라앉힌 색조는 죽음을 앞두고도 담담했던 모딜리아니의 내면을 엿보게 한다. 특히 모딜리아니 화풍에서 인장과도 같은 ‘비어 있는 눈’에 대해 그의 딸은 남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세상을 볼 수 없는 ‘텅 빈 구멍’이 아니라 외부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심안의 표현”이라고 말이다. 딸의 시선으로 본 아버지는 파멸해 가는 중독자가 아닌 자신의 소멸을 응시하면서도 작업을 이어간 고독한 예술가였다.
비참한 현실과 대조 이룬 정제되고 순수한 작품들
그렇다면 모딜리아니가 생애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자 동지를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1918)은 또 어떨까. 모딜리아니가 남긴 수많은 에뷔테른의 초상 중에서도 유독 흰옷이 도드라진 작품은 특유의 정형화된 양식미가 절정에 달해 있다. 하얀 옷을 입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에뷔테른은 시리도록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이 ‘푸른 눈’을 두고 딸은,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린 어머니의 푸른 눈은 “외부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먼 곳의 이상을 응시하는 ‘영혼의 창’이었으며, 부서질 듯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잃지 않았던 에뷔테른만의 내면적 강인함과 기품을 드러내는 요소”였다.
모딜리아니에게 에뷔테른은 단순한 모델을 넘어 현실의 비참함을 초월한 ‘성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딸이 복원하고 싶었던 진실은 어머니 에뷔테른이 단순히 아버지를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뮤즈’나 ‘희생양’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전도유망한 파리의 미술학교인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수학한 신진작가 에뷔테른이 직접 그린 ‘자화상’(1917)은 모딜리아니의 캔버스에서 우아한 곡선으로 미화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화상’ 속 에뷔테른은 보는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단호한 눈빛을 가지고 있으며 거침없는 필치, 실험적인 화면을 구사하는 주체적인 창작자다. 모딜리아니가 에뷔테른을 성스러운 미학적 대상으로 박제했다면, 에뷔테른이 스스로 기록한 자신은 고뇌하고 투쟁하는 한 명의 독립된 예술가였던 것이다.
잔 에뷔테른의 ‘자화상’(1917). 모딜리아니의 연인이자 모델로 더 유명하지만 에뷔테른도 유망한 화가였다. 모딜리아니가 숱하게 그린 초상화 속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스스로 자신을 그린 작품 속에서 에뷔테른은 강하고 단호하고 선명하다. 스물둘에 모딜리아니를 따라 생을 마친 탓에 실제 그림을 그린 건 4∼5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의 딸인 잔 모딜리아니는 어머니를 “비극적인 신화에서 빠져나온 당당한 여성예술가” 미술사에 세웠다. 카드보드지에 유채, 44.5×30.5㎝. 개인소장.
흥미로운 점은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 사이에 드리운 시선의 간극을 추적해낸 것이 바로 그들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버리고 떠났던 그 딸에 이끌려 아버지는 비극적인 신화에서 벗어난 미술사의 정당한 주역으로, 어머니는 비극적인 신화에서 빠져나온 당당한 여성 예술가로 역사 위에 다시 불려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의 작품만은 삶과 예술의 지독한 불화 속에서 비참하게 홀대당하면서도 끝내 살아남아 우리 앞에 있다. 결국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을 세상에 정당하게 되돌려주려 평생을 바친 딸의 헌신이야말로 삶이 던진 고통스러운 질문에 예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답변일지도 모르겠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