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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버섯' 조롱받던 소년, 황제를 뒤따르게 하다 [화폭역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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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37㎝ 독일 국민화가 '아돌프 멘첼'

척추질환으로 등 굽고 키 멈춰

외투 8개 주머니에 늘 스케치북

모든 것 그린 정교한 기록자 발판

프리드리히 일대기 삽화로 명성

왕실 기록·역사화로 최고 명예

정작 후세 가장 사랑한 작품은

일상고요 담은 빛·바람의 그림

아돌프 멘첼의 ‘무도회의 만찬’(1878). 프로이센 왕실이 의뢰한 역사화, 산업화 현장을 옮겨낸 기록화를 평생 그린 멘첼의 대표작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화려한 예복부터 공장 노동자의 해진 옷자락까지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증언’이라 믿었던 철학대로 사실적인 묘사를 목숨처럼 여겼다. 작품에서 멘첼은 여인의 머리에 박힌 보석·꽃 장식까지 정교하게 그리고 있는데, 일반적인 만찬장의 풍경뿐만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상류층의 행태 묘사에도 소홀함이 없다. 멘첼의 철저한 기록정신은 훗날 독일 미술이 사실주의·표현주의로 나아가는 바탕이 됐다. 캔버스에 유채, 71×90㎝. 알테국립미술관(독일 베를린)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화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키 137㎝. 사춘기 무렵 ‘쇼이어만 후만증’이라 불리는 척추 질환을 앓았다. 그로 인해 흉추 부위의 뼈가 쐐기 모양으로 찌그러지면서 등은 앞으로 구부러졌다. 머리는 어깨 위로 비정상적으로 솟아올랐고, 몸통은 눌린 듯 짧았으며, 팔은 몸에 비해 유난히 길었다. 성장이 멈췄을 때 키는 다른 성인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체적 조건은 곧 운명이 됐다.

거리에서 아이들은 소년의 뒤를 따르며 킬킬거렸다. 또래들은 ‘작은 버섯’이라 불렀고, 소년이 화를 내며 맞서면 ‘독버섯’이라고 했다.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고, 악수를 하려면 상대가 허리를 깊이 숙여야 했다. 이 병은 겉모습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압축된 흉곽 때문에 호흡이 얕았으며 쉽게 지쳤다.

작은 거장 아돌프 멘첼(1815∼1905). 프로이센, 그러니까 지금의 독일 땅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멘첼은 19세기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다. 프로이센은 군사 중심 국가였는데, 그는 군 복무 신체검사에서 당연하게도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왜소한 어깨에 가족 부양 짐까지 짊어졌던 소년가장

소년 멘첼은 자신의 생존은 물론 가족 부양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석판인쇄소를 운영하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마흔다섯 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아홉 살 여동생, 여섯 살 남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아버지의 인쇄소를 이어받은 멘첼은 메뉴판, 초대장, 졸업장을 닥치는 대로 만들었다. 어린 인쇄소 주인으로 거래처를 상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어린 동생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베를린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6개월 만에 그만뒀다. 당장 먹고살 일이 급해 석고상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멘첼은 평생 가족과 함께 살았고 모든 가족의 생활비는 다 그의 몫이었다. 가족에게는 늘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런 얼굴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동정을 구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투에는 여덟 개의 주머니를 달아 스케치북을 넣고 다녔고 하루도 빠짐없이 모든 것을 그렸다. 그러곤 어느새 무시할 수 없는 화가로 성장했다.

멘첼의 그림에는 반박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한 출판사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애를 다룬 삽화 400점을 의뢰받고 출판해 독일 전역에서 화제가 됐고, 이어 대형 역사화들을 수주받으면서 멘첼은 프로이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됐다. 그림을 인정받으면서 그의 몸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작은 버섯’이라 부르지 않았다.

만년의 아돌프 멘첼. 사진을 찍은 이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생전 멘첼은 작은 키를 드러내는 촬영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 사진은 길가 마차 옆에서 우연히 찍힌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멘첼은 프로이센이 예술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공적인 영광을 누렸다. 1890년 일흔다섯 살에 베를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898년에는 흑독수리 훈장을 받은 최초의 화가가 됐다. 이 훈장에 따라 귀족 칭호 ‘폰’(von)을 하사받았다. 베를린대 명예박사에 이어 파리아카데미와 런던왕립아카데미 회원, 브레슬라우(지금은 폴란드 브로츠와프)와 베를린의 명예시민까지. 아이들이 뒤에서 ‘독버섯’이라 놀리던 소년은, 모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신사가 돼 있었다.

1905년 2월 멘첼이 아흔 살로 생을 마쳤을 때 황제 빌헬름 2세가 장례를 주관하고 직접 관 뒤를 걸었다. 군주가 한 화가의 관 뒤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프로이센 역사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멘첼은 평생 왕실이 의뢰하는 역사화와 기록화를 그렸다. 사실 그대로를 그려야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포착하는 진실을 놓치려 하지 않는 집요함이 있었다. ‘무도회의 만찬’(1878)은 빌헬름 1세가 주최한 궁정 무도회에서 열린 만찬 장면을 의뢰받아 그린 그림이다. 군복 차림의 장교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의 여인들,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이 은식기 위에서 부서지고 있다. 얼핏 보면 화려한 궁정 기록화다. 왕실에서 의뢰한 그림이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뭔가 싶은 요소가 가득하다. 화면 중앙에는 한 남자가 여인에게 샴페인잔 올린 접시를 두 손으로 바치고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 옆의 여인은 접시에 코가 박힐 정도로 음식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의 사선 뒤편에는 부부처럼 보이는 커플에게 무릎을 굽히며 아부하는 듯한 여인이 보이고, 화면 왼쪽에는 음식에 빠진 신사들이 서 있다. 그중 한 남자는 체면도 잊고 다리 사이에 모자를 끼운 채다. 황제는 인파 가운데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아돌프 멘첼의 ‘무도회의 만찬’(1878) 디테일. 한 남자가 여인에게 샴페인잔 올린 접시를 두 손으로 바치고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 옆의 여인은 접시에 코가 박힐 정도로 음식에 몰두하고 있다. 여인들 드레스의 레이스, 머리의 보석·꽃 장식까지 정교하게 묘사했다.

결국 멘첼이 그린 것은 권력의 위엄이 아니라 권력의 무대에서도 여전히 무례하고, 남의 험담을 하고, 게걸스레 먹는 일에 집중하는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멘첼은 거대한 기록화 속에서도 자신이 본 것을 속이고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권력은 멘첼의 이러한 고집을 용인했고 그는 그런 대작들을 수없이 남겼다.

그러나 멘첼이 사망한 뒤 유품을 정리하던 막냇동생은 전혀 오빠의 그림 같지 않은 작품을 여럿 발견했다. 전시에 나온 적도 없고 가족조차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중 ‘발코니가 있는 방’(1845)은 ‘무도회의 만찬’과 비교하면 거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을 만한 그림이다. 발코니로 통하는 이 중 문이 열려 있고 바깥에서 바람이 들어와 하얀 커튼을 부풀리고 있다. 오후의 햇살은 비스듬히 마룻바닥에 길게 누워 있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의자 두 개가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놓였고, 벽의 거울이 문 너머의 빛을 다시 한 번 비춘다. 화면의 왼쪽 절반은 거의 텅 비어 있다. 벽과 바닥뿐이다.

인상주의 태동 20년 전…빛 담은 ‘발코니가 있는 방’

대담할 정도로 비어 있는, 작은 공간 속에서 빛과 바람만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 이 작품이 그려진 1845년은 모네가 빛의 인상을 화폭에 담겠다고 나서기 20여 년 전이다. 인상주의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베를린의 작은 남자는 자기 방에 들어온 오후의 빛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다. 대형 캔버스 앞에 발판을 놓고 올라가 팔을 뻗어야 했던 멘첼은 자기만의 시간에는 이렇게 작고 고요한 그림을 그렸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위업도, 대관식의 장엄함도 아닌 자기 방에 들어온 바람을 그리고는 서랍에 넣어뒀다.

바로 이 그림이 지금은, 멘첼의 작품 수천 점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됐다. 베를린의 국립미술관은 이 작품을 소장품 중 대표작으로 내세우며 베를린 관광 안내에서도 반드시 언급한다. 2012년 독일우정국이 발행한 ‘독일 회화’ 시리즈 우표에도 등장할 정도다. 또 미술사가들은 ‘인상주의 이전의 인상주의’라고 이 그림을 평가하고 있다.

아돌프 멘첼의 ‘발코니가 있는 방’(1845). 19세기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일대기를 그린 삽화로 명성을 얻고 독일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21세기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예고한 ‘빛과 바람의 그림’에 열광하고 있다. 생전 공개하지 않았던, 멘첼이 ‘숨겨둔 작품’ 중 하나다. 유려한 붓질로 빛의 효과를 다뤄내며 시대를 초월한 진보적인 감각을 내보이고 있다. ‘인상주의 이전의 인상주의’란 평가를 받는다. 캔버스에 유채. 58×47㎝. 알테국립미술관(독일 베를린) 소장.

역시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멘첼을 먹여 살린 것은 역사화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연작과 궁정 기록화가 그에게 명성을, 귀족 칭호를, 황제의 장례를 안겨줬다. 오늘날에도 미술사의 중요한 연구대상이며 위대한 작품이라는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그 역사화들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간다. 하지만 그들을 멈춰 세우는 것은 ‘발코니가 있는 방’이다. 거대한 역사화 앞에서의 감탄이 그 시대의 영광에 관한 것이라면, 이 작은 그림 앞에서의 감탄은 마음을 흔드는 종류의 것이다.

‘발코니가 있는 방’ 앞에서 사람들은 19세기 프로이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느 오후를 떠올린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아무도 없는 방의 고요, 그 고요 속에서 커튼이 바람에 한 번 부풀어 오르는 순간, 어디선가 봤던 자신의 순간을 말이다. 역사화가 특정한 시대와 사건에 묶여 있다면, 이 작은 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나 있다. 바람과 빛과 고요는 1845년에도 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불고 있으니까 말이다. 공적인 영광은 역사가 거둬 갔고 사적인 공기는 우리에게 남았다. 세상에 내보인 것들과 숨겨둔 것들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는 비로소 137㎝의 몸 안에 방대한 역사를 뒤로한 인간 멘첼을 만난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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