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운동가 버지니아 주프레
엡스타인의 성범죄 피해자였지만, 피해 사실 폭로하며 심판에 앞장
여덟살 무렵부터 성적 학대 겪고 트라우마로 자기 파괴적 삶 살아
폭로 이후 책 집필하고 세상 떠나
◇노바디스 걸/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김나연 옮김/656쪽·2만7000원·은행나무
2022년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들고 있는 버지니아 주프레.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희대의 아동 성폭력범 제프리 엡스타인,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이자 공모자인 길레인 맥스웰. 신간은 엡스타인의 소굴에서 살아남아 그들을 심판하는 데 앞장섰던 여성 인권운동가 버지니아 주프레가 남긴 회고록이다.
그동안 주프레의 이야기는 책과 인터뷰, 기사, 영화, 미니시리즈, TV 특집 프로그램 등을 통해 꽤 전해졌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직접 말한 것은 이 책이 처음. 지난해 세상을 떠나기 전 마무리한 책이니, ‘최후의 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프레는 여덟 살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 얼마 뒤에는 아버지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갈 곳 잃은 분노는 마약과 비행으로 이어졌고, 청소년 재활시설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곳을 탈출한 뒤에는 열다섯 살에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한다’는 남자에게 감금돼 성착취를 당했다. 이후 엡스타인의 저택으로 유인돼 3년여 동안 피해를 입었다.
주프레(가운데)는 제프리 엡스타인과 그의 여자친구 길레인 맥스웰(오른쪽)의 회유와 강요로 17세 때부터 영국 앤드루 왕자(왼쪽)를 포함한 각국 유명 인사들에게 성을 상납하도록 강요당했다고 폭로했다. 사진 출처 AP 뉴시스
엡스타인은 그녀처럼 이미 상처 입고 무너진 소녀들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녀를 포함한 많은 피해자는 엡스타인의 본색을 알면서도 그의 소굴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엡스타인을 만나기 전, 우리가 어떤 세월을 견뎌 왔는지 먼저 보라고.
아버지의 성적 학대가 계속되던 어느 날, 대가족이 함께 떠난 캠핑 여행에서 벌어진 일이다. 삼촌과 고모가 듣는 자리에서 그녀는 외쳤다. “이 새끼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몇 년이나 나를 강간했다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입술이 터지고 한쪽 눈이 부어 감길 때까지 폭행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학대를 소리 내어 폭로했으니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다음 날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어릴 적 그녀는 요로감염을 반복적으로 앓았다. 증세가 심할 때면 소변을 참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허리에 스웨터를 묶고 다녔다. 결국 ‘오줌 소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어머니는 젖은 속옷을 발견할 때마다 격분해 엉덩이가 얼얼해질 때까지 매질했다. 제대로 된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던 그녀에게, 누군가 자신을 챙기고 돌봐주며 필요를 알아봐 주는 행동은 모성처럼 보였다. 그래서 맥스웰을 한때 어머니 같은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주프레가 이 모든 상처를 딛고 일어선 건 딸을 출산한 이후였다. 이 아이에게만큼은 자신이 겪은 일을 절대 겪게 하지 않겠다고, 더 나아가 단 한 명의 소녀라도 더 구해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트라우마와 침묵을 떨치고 투사로 거듭났다. 피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9년 마침내 엡스타인은 성매매와 인신매매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자살했다.
지난해 4월, 주프레 역시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생존 이후에도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이 남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결말이다. 때문에 책을 읽는 일은 무척 고통스럽다. 폭력과 방임,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을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는 ‘단 하나의 삶이라도 지켜지기를’ 바라며, 자신이 죽더라도 이 책을 꼭 출간해 달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주프레는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데 앞장섰고, 피해자 지원 단체를 설립했으며, 아동 성폭력 사건의 공소시효를 연장하거나 폐지하는 법 제정에도 힘을 보탰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이 책은 그녀의 목소리를 오래도록 남겨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