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강민경 지음│푸른역사
일왕까지 궁금해 했다는 붓글씨
힘 있고 정갈한 ‘안진경체’ 사용
기교 뛰어났음에도 독창성 없어
일제 등에 업은 위상 높은 인물
글씨 소유가 곧 당대 위세 보증
친일파 중심 ‘명필신화’ 만들어
이완용이 비단 바탕에 붓으로 쓴 글씨 ‘평상심시도’. 기교가 엿보이나, 여러 점 남긴 다른 평상심시도와 비교해 “독창성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왼쪽 사진). 이완용이 쓴 ‘행서 사언시’.일견 호방한 멋이 있지만 글씨의 중심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저자의 평이다(오른쪽). 푸른역사 제공
“그의 글씨를 받기 위해 사방에서 보낸 비단과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일왕이 그의 붓글씨 솜씨를 보고 싶어, 조선 총독을 통해 글씨를 보내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대한제국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무렵, 이른바 ‘명필’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다. 당대 권력 있는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 후 미국 유학을 거쳐 정부 관리까지 오른 인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다가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후작 각하가 된 인물. 바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노’, 일당(一堂) 이완용(1858∼1926)이다. 이완용의 붓글씨에 대한 이 같은 평가는 우선 그의 처조카 김명수가 펴낸 이완용 전기 ‘일당기사’에 등장하지만, 다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대한제국 시기 그는 궁궐 현판과 상량문을 여러 번 쓴 경험이 있고, 일제강점기에도 글씨로 이름을 날리며 서화 단체 창립에 관여했다.
그렇지만 당대에 글씨를 잘 쓴다고 ‘알려진 것’과 정말 ‘잘 쓰는 것’은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일하며 역사 연구자로 활동해온 저자가 주목한 것도 이 지점이다. 이완용에게 우리가 주목할 만한 뛰어난 붓글씨가 정말 존재하는지, 그가 어떻게 잘 쓴다는 ‘평가’를 받게 됐고, 이후 서화계를 넘어 한국 근현대 미술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됐는지다. 한번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 ‘매국노’라는 천인공노할 꼬리표 앞에서도 쉬이 멈출 수 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해 국권을 일제에 넘긴 이완용. 푸른역사 제공
이완용이 즐겨 써 현재도 여러 점 남겨진 붓글씨 중 ‘평상심시도’라는 것이 있다. “평상심이 곧 진리”라는 뜻. 먼저 이완용은 당나라 때 이름난 서가 안진경이 구사한, 박력 있으면서도 정갈한 ‘안진경체’를 주로 썼는데 여기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글씨의 구도나 각도, 비단에 먹 쓰는 솜씨에서는 ‘테크니션’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획과 배치를 보여 “독창성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 같은 시기를 살았던 서화가 오세창, 근대 화가 김은호 등의 평도 박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이완용이 나름의 실력을 갖췄음에도 명필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워진다. 그간 우리가 ‘서여기인(書如其人)’, 즉 “글씨가 그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 이전 사료에는 이완용의 붓글씨에 대한 높은 평가가 많지 않다는 것에도 주목할 만하다. 그를 명필로 만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오히려 글씨 그 자체이기보다는, 일제를 등에 업은 이완용의 사회적·정치적 위상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글씨를 갖는 것은 당시 소유자의 상당한 위세를 보증하는 징표이기도 했기에, 일본인과 친일적 지식인들이 자연스레 이완용 글씨가 좋더라는 세평을 만들었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나라가 해방되고 ‘매국노’가 쓴 글씨의 값어치는 땅에 떨어졌다.
이완용이 ‘독립문’의 편액(문 위에 거는 액자)을 썼다는 가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완용이 청나라를 겨냥한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이자 위원장이었고, 해당 내용이 1924년 동아일보에 언급됐다는 점에서 일견 근거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외 근거가 전무하다시피 하고, 이완용 전기 ‘일당기사’에도 언급조차 없어 사실로 단정 짓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완용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한국 서화와 근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을 간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제강점기 초 조선에서는 붓글씨를 그림과 함께 미술의 범주 안에 포함해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따라 초기 미술단체인 경성서화미술원,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모두 서화를 내세웠는데, 이들 단체에 이완용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기 때문.
이완용은 자신이 후원하던 경성서화미술원을 서화미술회로 바꾸고 1912년 회장 자리에 올라 권력을 누렸다. 이는 이완용 개인의 영욕에 의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당대 조선 서화계 인사들을 포섭하려 한 일제의 책략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완용의 붓글씨와 이를 둘러싼 맥락을 잠시 멈춰 돌아서 봐야 할 이유도, 바로 당대 사회와 예술의 흐름을 파악해볼 수 있다는 데 있다. 288쪽,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