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한국인’ 민병갈 설립자
1970년부터 민둥산에 나무·꽃 심어
전 세계 목련 1000종중 926종자라
‘비밀의 정원’ 공개 4월25일까지 연장
천리포수목원 ‘비밀의 정원’ 목련원.
비밀의 정원 별목련.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 닮은 별목련이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부드러운 햇살 잔뜩 머금은 예쁜 미소 보내며. 순수의 정수, 하얀 목련 지나자 붉은 와인 머금은 듯 진한 봄의 문장 써내려가는 매혹적인 자목련이 손짓하고. 그 옆에선 봄볕 따스함 투명하게 걸러내 고고한 기품 더한 노랑 목련이 나 좀 봐달라며 노래한다. 목련이 필 때만 살며시 빗장을 푸는 천리포수목원 ‘비밀의 정원’. 산허리 감싸는 목련의 바다가 마치 꿈결 같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척박한 땅에 집념으로 일군 민간정원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정원으로, 매년 목련이 필 때 잠시 문을 여는 공간이 숨어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목련이 지천으로 피고 지는 ‘비밀의 정원’이다. 오전 9시 천리포수목원 에코힐링센터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중요한 행사 준비로 바쁘다. 마침 수목원 설립자 ‘푸른 눈의 한국인’ 민병갈(미국명 칼 페리 밀러)의 24기 추도식이 열리는 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출생한 민병갈은 23살이던 1945년 미국 정보장교로 한국에 파견됐고 태안반도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곳에 눌러앉았다. 1979년에는 아예 귀화해 한국 이름 민병갈을 얻었다.
천리포수목원 밀러가든 추모정원 민병갈 설립자 흉상.
그가 처음 한 일은 수목원 조성 사업. 사재를 털어 1962년 천리포 해변의 황량한 민둥산을 매입해 197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나무와 꽃을 심기 시작했다. 특히 목련 사랑이 대단했다. 전 세계에 약 1000종의 목련이 있는데 천리포수목원에만 무려 926여종이 자랄 정도다. 또 동백나무 1096종, 호랑가시나무 566종, 무궁화 371종, 단풍나무 251종 등 모두 1만6895개 분류군을 보유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류가 자라는 수목원이 됐다. 수십년에 걸친 그의 한결같은 나무사랑 덕분에 천리포수목원은 아시아 최초, 세계 12번째로 세계수목원협회 인증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선정됐다. 전체 규모는 58만9429㎡로 방대하다. 수목 전문가와 후원자들에게만 입장을 허용하던 수목원은 2002년 민병갈 타계 후 그가 남긴 빼어난 자연 유산을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2009년부터 설립자의 성을 딴 밀러가든(6만5623㎡)만 개방하고 있다.
비밀의 정원 탐방.
비밀의 정원 탐방.
수목원은 매년 목련축제 때 ‘비밀의 정원’을 오픈하는데 바로 이곳에 희귀한 목련들이 몰려있다. 천리포수목원은 바닷가이고 산속에 조성돼 꽃이 피는 시기가 좀 늦다. 더구나 올해는 목련 개화 시기가 평년보다 열흘가량 늦게 피기 시작했다. 이에 3월 27일~4월 19일로 예정됐던 제9회 천리포수목원 목련축제가 4월 25일까지 연장됐다. 덕분에 올해는 좀 더 오래 비밀의 정원을 엿볼 수 있다. 프로그램은 두 가지. 가드너의 해설과 함께하는 산정목련원 탐방(1인 5만원)은 하루 한 차례 오전 9시30분에 출발하고 목련정원 탐방(1인 4만원)은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두 차례 운영한다.
비밀의 정원 탐방.
비밀의 정원 별목련.
◆별목련 만나는 비밀의 정원
가드너로 활동 중인 황금비 홍보팀장과 산정목련원 탐방에 나선다. 황 팀장은 “바다 근처는 바람이 아주 강하며 농사짓기조차 힘들 정도로 땅의 염분이 많고 척박하다”며 “나무가 살기 어렵기 때문에 전 세계에 어디를 가도 바다 옆에서 조성된 수목원은 거의 없다”고 설명한다. 민병갈은 이런 척박한 땅에 뭘 심으면 잘 자랄지 고민하고 연구하다 목련을 하나둘 심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늘어 온대 지역에 서식하는 거의 대부분의 목련이 수목원에 살게 됐다. 평소 접하는 목련은 하얀 목련과 자목련 정도이지만 수목원에는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목련도 있다는 황 팀장의 설명에 탐방객들이 깜짝 놀란다. 목련은 종류에 따라 봄에서 가을까지 피는데 파란색 목련은 5월 말에서 6월 초쯤 볼 수 있다.
비밀의 정원 별목련.
탐방객들은 재미있는 목련의 역사도 공부한다. 사실 목련은 공룡이 살던 약 1억년 전 백악기에 처음 나타난 원시 식물. 당시는 꿀벌과 나비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이어서 대신 딱정벌레가 꽃가루를 옮겼다. 딱정벌레의 거친 턱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목련의 꽃잎은 크고 가죽처럼 두꺼운 튼튼한 구조로 진화했다. 원래는 지금보다 크기가 훨씬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크기로 작아졌다. 실제 현재도 일본목련이나 빅리프 목련은 잎 길이가 1m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거대하다. 황 팀장의 설명을 들으니 설립자가 이 척박한 땅에 목련을 심은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밀의 정원 동백.
산정상 목련과 수선화.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하자 다양한 목련이 하나둘 얼굴을 내민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목련은 별목련. 진짜 별처럼 촘촘한 잎이 돋보인다. 일반 목련은 꽃잎이 넓고 두툼하며 꽃잎이 많아야 6~9장이지만 별목련은 12~18장이고 많게는 30장이 넘는 종류도 있다. 더구나 꽃잎이 리본처럼 좁고 길쭉해 꽃이 활짝 피면 마치 가느다란 꽃잎들이 사방으로 퍼진 별 모양으로 보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탐스러운 동백꽃도 주렁주렁 달렸고 노란 수선화 꽃밭도 펼쳐져 화사한 봄의 향기를 더한다. 목련을 뜻하는 ‘MAGNOLIA’ 포토존을 배경으로 예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비밀의 정원 큰별목련.
비밀의 정원 목련원.
가을이면 곱게 물드는 단풍나무 숲, 민병갈 설립자가 살던 한옥 목련집, 후박나무집을 지나면 또 꽃밭이다. 막 피기 시작한 선라이즈 목련과 수선화가 어우러지는 예쁜 풍경을 놓칠 수 없어 탐방객들은 인생샷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몸통이 아주 붉은 적피배롱나무를 지나자 비밀의 정원 하이라이트, 목련원에 닿는다. 모스맨스 자이언트, 선 스프라이트 등 크고 작은 다양한 희귀 목련이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 세상을 걷는 것 같다.
밀러가든 큰 연못 포토존.
밀러가든 큰 연못과 민병갈 기념관.
◆낭새섬 만나는 밀러가든
‘비밀의 정원’ 탐방을 놓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항상 개방되는 밀러가든에도 온갖 종류의 목련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비밀의 정원’ 탐방객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큰 연못으로 다가서자 스펙트럼, 아테네, 밀키웨이에 이어 정열적인 붉은색으로 유혹하는 불칸,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다렐 딘 등 처음 보는 목련들이 화사하게 정원을 꾸민다. 밀러정원에선 약 50종의 목련을 만난다.
밀러가든.
낙우송 뿌리.
큰 연못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연못가에 종유석처럼 땅에서 무릎 높이로 길게 솟아오른 희한한 나무뿌리가 보이는데 바로 옆 커다란 낙우송의 ‘숨 쉬는 뿌리’다. 물을 좋아하는 낙우송이 습지에서 숨을 쉬려고 만들어내는 신비한 모양의 뿌리로 ‘기근’으로도 불린다.
연못 산책로를 끝까지 걸으면 민병갈 설립자의 흉상을 모신 추모정원을 만난다. 이곳 태산목 리틀 젬 목련 아래 그가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는 생전에 묘지를 쓸 자리가 있으면 나무 한 그루를 더 심으라고 유언했을 정도로 나무심기에 진심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안장 10년 만인 2012년 4월 수목장으로 이곳에 그를 모셨다. 민병갈 설립자가 접목을 통해 개발한 목련 라즈베리 펀과 다양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추모정원을 꾸미고 있다.
민병갈 추모정원.
오구나무 포토존.
다정큼나무집 큰별목련.
빨간 벤치가 놓인 오구나무 포토존에 잠시 쉬었다가 그늘정원으로 향한다. 봄이면 복수초, 설강화, 앵초, 노루귀 등 앙증맞은 꽃이 피고 여름에는 비비추, 휴케라, 산수국이 싱그러움을 더한다. 가을에 천남성 종류가 예쁜 열매를 맺는 곳이다. 운치 있는 초가 모양으로 만든 다정큼나무집 주변에는 큰별목련 메릴이 화사하다. 별목련과 일반 하얀 목련을 교배한 목련으로 이름처럼 탐스러운 큰별 모양을 지녔다. 비비추원, 호랑가시나무원, 멸종위기식물 전시원을 지나면 바닷가에 다소곳하게 앉은 한옥 해송집을 만난다. 초가와 기와집 매력이 빠진 민병갈 설립자는 수목원에 기와집 11채, 초가 2채를 지었는데 가장 처음 지은 해송집이다. 1970년 서울 무악재 도로공사로 헐리게 된 한옥 5채를 해체한 뒤 미 군용트럭으로 옮겨 한옥 3채로 재건축했다.
밀러가든 배롱나무.
천리포 해변과 낭새섬.
천리포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에선 푸른 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는 예쁜 낭새섬도 만난다. 마침 물이 빠져 섬으로 이어지는 길이 또렷하다. 천리포 사람들은 섬이 닭 벼슬을 닮았다는 이유로 ‘닭섬’으로 부른다. 민병갈은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살아 ‘낭새’로 불리는 바다직박구리가 이 섬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낭새가 섬에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낭새섬으로 이름을 지었다. 낭새섬은 현재 천리포수목원에 포함된 곳으로 1980년대부터 호랑가시나무 등 자생상록활엽수를 심어 복원 중이다.
수목원 1호 후박나무.
수목원의 수많은 나무는 위치와 식재 시기 정보가 담긴 식별표를 달고 있는데 소사나무 카페 앞 커다란 후박나무가 1970년에 심은 수목원 1호 나무다. 수피가 무르고 달콤한 수액이 나와 수액을 졸이면 달콤한 후박엿이 된다. ‘울릉도 호박엿’의 유래가 된 바로 그 후박나무다. 카페에선 비트차, 작두콩차, 겨우살이 등 다양한 차를 즐길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음료는 수목원의 목련으로 만든 목련차. 큰 꽃잎 한 장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은은한 목련향이 비강으로 파고들어 봄을 아련한 목련의 향기로 기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