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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처칠도 놀란 이승만의 승부수 ‘반공포로 석방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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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휴전 협상 타결이 임박한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초대형 뉴스가 전 세계를 강타합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격노했고, 처칠 영국 총리는 면도를 하다 놀라 얼굴을 베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5년 만에 또 터진 전쟁으로 전 세계 젊은이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마침내 성사되는 줄 알았던 휴전이 백지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 국제사회는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승부수 ‘반공 포로 석방’은 완벽한 대반전을 이뤄냈고, 대한민국이 오늘의 글로벌 선진국으로 도약한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다 객관적 시각으로 보기 위해 당시 미국 기자의 기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반공 포로 석방 이틀 후인 6월 20일 미국 기자 하워드 핸들맨의 기사가 세계 4대 통신사였던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와 한국 합동통신을 통해 타전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한국은 바로 어제까지는 실행하리라고 믿을 수 없었던 위협을 18일 실천하였다. 그들은 포로 문제를 그들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 휴전협정 조인의 전야라고도 할 이날, 한국에 있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이 석방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있는 모든 포로를 석방하고 말았다(중략) 말할 것도 없이 이번 한국 측 조치는 판문점에서 거의 완성된 휴전의 조인을 천연(연기)시켜 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끼칠 이 조치의 역사적인 영향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핸들만은 이 대통령의 자주적 조치가 한국 국민에게 환호를 받고 있다고 썼습니다.

“무엇보다도 휴전 전야에 주권 국가의 이름으로 연합군 사령부에 항거함으로써, 연합국과 협조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중공과 협조하는 북한 괴뢰 집단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독립권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중략) 한국 측의 포로 석방 조치는 공산주의자나 민주주의자를 구별할 것 없이 전 한국인에게 어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석방 조치는 한국인의 가장 영웅적이고 전통적인 3·1운동 당시와 같이 돌발적이고, 비밀리에 취하여졌다. 이 대통령의 포로 석방 조치는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민족 자결주의의 이름 아래 행하여진 것이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핸들만은 또 일방적 휴전에 반발해 온 이승만 정부가 이를 행동으로 저지할 수 있음을 서방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늘날까지 한국 측이 이러한 필사적인 조치를 취하리라고는 아무도 추측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외교관들은 이 대통령이 어느 종류의 행동이라도 취할 수 있으리라고 말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과 워싱턴으로부터는 이 대통령이 종국에 가서는 연합국 측에 협조하리라는 확신만이 전해졌었다.(중략) 3년간이나 전란에 시달린 한국은 미국의 광범한 원조 없이는 경제적으로 소생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군은 강하기는 하지만 현재 전선에 출동하고 있는 중공군과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행동을 취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불신할 수도 없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휴전 논의가 본격화된 1951년 6월부터 이 대통령은 휴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6월 10일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수만 명의 군중이 운집해 휴전 반대 궐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휴전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빨리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을 것이라는 지금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 안전보장장치 없이 휴전해 버리면 김일성 정권과 중공군은 곧 다시 쳐들어올 것이고, 그때는 미국이 다시 한국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눈앞까지 왔던 통일이 무산된 데 대한 국민적 울분도 컸습니다. 1945년 분단과 1950년 전쟁으로 수많은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이 남북으로 찢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그대로 분단이 고착되면 영영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2년 3월 트루먼 미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휴전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냅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없이는 휴전을 수락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공산화 직전의 한국을 구해준 세계 최강대국에게 약소국이 이런 태도를 보인 외교 관계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한국은 자유 세계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대등한 동반자’라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으면 한국이 다시 공격받을 경우 미국이 자동 참전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무려 3만6천 장병을 희생시킨 미국은 상호 방위 조약 체결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습니다. 미국은 국군 전력을 증강시키고, 공산군이 다시 쳐들어오면 대규모 보복 조치를 가한다는 등의 대안을 제시했지만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952년 11월 아이젠하워가 새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거듭 요구합니다. 휴전회담 대표였던 백선엽 대장에게는 협정에 절대 조인(調印)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런 가운데 휴전 협상은 2년 동안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최대 쟁점은 포로 교환이었습니다. 유엔군은 포로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자는 ‘자유 송환’을, 공산군은 무조건 원래 소속대로 보내야 한다는 ‘강제 송환’을 주장했습니다. 북한군 15만, 중공군 2만 등 공산 포로 17만명 중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사람은 1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을 반공 포로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1945년부터 김일성 공산 정권의 실상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억지로 끌고 갔던 남한 출신 포로도 상당수였습니다. 1952년 1월 11일 반공 포로 5500명은 ‘반공청년동맹’을 만들어 강제 송환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9월에는 26551명이 혈서까지 쓰면서 강제 송환을 막아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우리가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겠다. 우리는 남한 출신보다 반공 정신도, 좌우를 가리는 판단력도 배나 강하다. 즉시 석방 심사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을 달라”고 이들은 호소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들은 자주 충돌했습니다. 친공 포로들은 1952년 5월 7일 포로수용소장인 프랜시스 도드 미군 준장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반공 포로 100여 명을 살해하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포로 대우 개선과 포로대표단 구성 등을 합의한 뒤에야 도드 준장을 풀어줬고, 폭동은 한 달여 만인 6월 10일에야 완전 진압됐습니다. 유엔군은 이후 포로들을 친공과 반공으로 분리해 반공 포로는 대부분 거제도 밖의 수용소로 내보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1953년 3월 5일 소련 독재자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급사합니다. 내부 사정이 복잡해지고 중공도 견제해야 하는 형편이 된 소련은 휴전을 서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교착됐던 협상은 급물살을 탑니다. 그러자 4월 5일 2군단 창설 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이 이룩되지 못한 휴전보다는 차라리 한국·만주 국경선으로 진격을 단행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도 서한을 보내 “중공군이 철군하지 않고 압록강 남쪽에 그대로 주둔할 경우, 우리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되찾아와 독자적 작전을 단행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4월 21일 국회는 북진통일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전국적 휴전 반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만 회신했을 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6월 8일 포로 송환 협상이 결국 타결됩니다. 휴전이 급해진 공산군 측이 한발 물러섰기 때문입니다. 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에 대해서는 북한 대표단이 송환을 권유할 기회를 주고, 그래도 거부하면 제3국인 인도 등으로 보낸 뒤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권유’일 뿐 악랄한 협박과 폭력이 난무할 것이며, ‘제3국’ 인도 역시 친공 국가라고 본 반공 포로들은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국내 여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3년 6월 11일 자 조선일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폭발된 민족의 비분>이었습니다. “겨레의 총의를 무시하고 끝끝내 포로 교환 협정을 체결함에 이르자 서울시민들은 불같이 터져 나오는 울분과 분노를 억제할 길 없이 9일 아침부터 대규모 데모를 행하고 북진 통일의 굳은 결의를 다시금 내외에 선포하였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0만명에 이르는 시위 행렬이 시청 앞 조선호텔을 지나 남대문 미 8군 사령부를 향해 쏟아져 나갔고 수만 명의 남녀 학생이 등교를 거부하고 눈물을 흘리며 북진 통일을 외쳐 3·1운동을 방불케 했다’고 신문은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도 ‘종래 보지 못한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참여를 위해 상가, 극장, 다방, 식당들도 영업을 중단했다. 시위에 참가한 진명여고 학생 21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고 썼습니다.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없는 휴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목숨 걸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젊은이들을 사지로 돌려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공포로 중에는 북한으로 돌아가느니 죽겠다는 각오로 몸에 태극기 문신을 새겨 넣은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결정은 반공포로 석방이었습니다. 공산국가는 물론 동맹까지 등지면서 전 세계와 맞서는 일대 모험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 대통령은 포로협상 타결 이틀 전인 6월 6일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반공포로 석방 방안 검토를 지시했습니다. 원용덕은 ‘포로교환은 의무적이 아니다. 전쟁 포로는 그들을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는 제네바 협정 내용에 착안해, 국군 지휘권은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돼 있지만 한국은 교전 당사국으로서 영토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전투병력이 아닌 헌병은 편제상 유엔군사령부 관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군이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육,해,공군의 모든 헌병을 국군 헌병총사령관 지휘 하에 둔다고 선포하고 원용덕 사령관에게 반공포로 석방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마침내 6월 18일 부산·대구·광주·마산·영천·논산·부평 수용소 7곳에서 반공 포로 3만5400여 명 중 2만6930명이 풀려나왔습니다. 당시 포로 수용소에는 미군 경비 병력이 단계적으로 철수해 전선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를 한국군이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소수의 행정 병력만 남아 있었습니다. 반공 포로 석방은 대한민국 군과 경찰의 협조하에 유엔군의 통제를 무력화한 대탈출극이었습니다. 유엔군이 탈출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반공 포로 61명이 목숨을 잃고 116명이 다쳤으며 8293명은 미처 탈출하지 못했지만 이들도 1954년 1월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우리 국민은 자유의 몸이 된 반공 포로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숙식을 제공해 줬습니다. 정부는 곧바로 신분증을 발급해 줬고, 식량과 용돈 등 구호의 손길이 답지했습니다. 경향신문은 ‘석방된 애국 포로 보호하자’라는 기사에서 “온 국민이 정부의 용단에 쌍수를 들어 환성을 올렸으며 거리의 데모대는 애국 포로를 보호하자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북진 통일을 외치며 정부의 긴급 조치에 절대 지지의 결의를 표명하였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국회부의장 조봉암, 윤치영 씨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은 당연하고 통쾌한 조치라며 안면에 희색을 띠우고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일반 국민은 이번 조치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석방된 반공 포로들은 “죽음에서 소생했다”며 “자유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숙원을 달성했으니 이제부터 북진 통일에 피를 뿌려 8년간의 원수를 갚겠다. 동포들의 따뜻한 환영에 눈물이 복받쳐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6월 20일 자 동아일보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습니다. 실제로 황봉운 씨 등 반공 포로 12명은 북진 전열에 참가시켜 달라며 입대를 탄원하는 혈서를 국방장관에게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러나 국제사회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휴전 협상 좌초 위기에 미국과 영국은 경악했습니다. 이승만을 거칠게 비난하는 여론이 끓어올랐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초단문(超短文) 전문’과 처칠 총리의 ‘배신’ 발언은 당시 분위기를 실감케 합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렸던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승부수는 놀라운 대반전을 이뤄냅니다. <하(下)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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