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73년 3월 6일 81세
펄 벅. 1960년.
퓰리처상(1932)과 노벨 문학상(1938)을 받은 미국 소설가 펄 벅(1892~1973)은 1960년 11월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조선일보사와 여원(女苑)사 초청으로 11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간 머물렀다. 서울을 비롯해 대구·경주·부산·판문점 등을 찾았다.
펄 벅은 방한 기간 중 전쟁 고아·혼혈아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3년 전 한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 혼혈아 입양을 타진했다.
펄 벅 "혼혈아 기르겠다". 1957년 3월 15일자 3면.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가 우리나라 혼혈아들을 기르겠다는 희망을 표명한 서한을 보내왔다고 한다. 보건사회부에서 십사일 알려진 바에 의하면 펄·벅 여사는 현재 미국에서 고아원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동 여사는 전기 서한 가운데서 혼혈아들을 보내주면 고아원에서 양육할 것이라고 말하고 적당한 가정이 있으면 양자로서 입양시키겠다고 말했다 한다.”(1957년 3월 15일 자 석간 3면)
펄 벅은 본디 아시아 지역에 관심이 컸다.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중국에서 살았다. 대학 공부를 위해 미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 금릉대학 등에서 10여 년간 영문학을 가르쳤다. 대표작 ‘대지’(1931)는 빈농 출신 중국인 왕룽이 대지주가 되는 과정을 아내 오란 및 세 아들의 삶과 함께 엮은 장편소설이다.
펄 벅 여사, 한국 혼혈아 7명을 양육. 1958년 3월 26일자 3면.
펄 벅은 방한 전인 1958년 이미 한국 혼혈아 7명을 입양했다.
“미국 펜실바니아 주에 사는 저명한 작가인 펄·벅 여사가 주관하는 ‘월캄·하우스’에서 우리나라 혼혈 고아 칠명을 입적시키게 되어 24일 하오 1시 서북항공 편으로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혼혈 고아들은 한 살부터 다섯 살짜리의 어린이들인데 크로슨 양이 보호 인솔할 것이라고 한다.”(1958년 3월 26일 자 석간 3면)
펄 벅은 1960년 11월 2일 방한 인터뷰에서 한국의 미래를 낙관했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나라지만 머지않아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60년 11월 4일자 4면.
“펄·벅 여사는 한국에 대한 인상을 말하는 가운데 “여태까지 나는 한국에 대한 아무런 확신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모든 어려움과 굳건히 싸와 나가는 한국 사람을 대하니 지금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으나 멀지않아 한국은 오히려 원조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하였다.”(1960년 11월 4일 자 석간 4면)
한국은 2010년 선진 공여국 클럽인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정식 가입하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다. 펄 벅은 이를 50년 전 예언한 셈이다.
1960년 11월 9일자 4면.
펄 벅은 1960년 방한을 비롯해 사망할 때까지 모두 여덟 차례 한국을 찾았다. 1965년 혼혈 아동을 돕는 ‘펄 벅 재단’을 설립하고 경기도 부천에 아동 보호 시설 ‘소사 희망원’을 세웠다. 한국을 자주 찾은 이유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현재 부천에 소사 희망원 자리에 펄벅 기념관이 있다.
펄 벅은 별세 8개월여 전인 1972년 6월 미국 필라델피아 펄벅재단을 찾은 이영호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만나 ‘한국 고아’가 아니라 ‘한·미 고아’라고 불러야 한다면서 한·미 혼혈아 2000명을 입양·교육했다고 밝혔다.
1972년 7월 19일자 3면.
“한국 고아가 아니고 한미(韓美·Korean-American) 고아라고 해야지요. 우리는 혼혈아만 다뤄요. 순수한 한국 고아도 불쌍하지만 그들은 조국이 있어요. 그러나 혼혈아에게는 한국이 조국이 되기 힘들지요. 머리색깔이 다르고 어떤 애들은 눈이 파라니까요. 한국 같은 동질적인 사회에서 이들이 완전히 수용되어 살기가 힘들지요.”(1972년 7월 19일자 조간 3면)
부음 기사에서도 혼혈아 입양 및 교육을 서술했다.
펄 벅 별세. 1973년 3월 7일자 5면.
“노년에 이르러 벅 여사의 관심은 미군이 남겨 놓은 아시아 고아들에 집중되었다. 소설의 성공으로 모은 돈을 고아의 구호에 사용했으며 혜택을 받은 고아 수는 2천명을 헤아린다. 64년 설립된 이 펄 벅재단에 그녀는 전 재산을 희사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하나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이외에 그녀는 9명의 혼혈아를 양자로 키웠다. 49년에 설립한 내슈빌의 ‘웰컴하우스’에는 그녀의 양자들과 12명의 손자들 이외에 4명의 한국 소녀가 살고있다.”(1973년 3월 7일 자 조간 5면)
펄벅 재단에 분향하는 혼혈아들. 1973년 3월 8일자 7면.
펄 벅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출간했다. 1963년 출간한 ‘살아 있는 갈대’는 구한말부터 해방기까지 양반 가족이 겪은 고난을 담았다. 주인공 김일한 이름은 미국에서 알고 지낸 지인 유일한 유한양행 창립자에서 따왔다. 이 밖에도 6·25전쟁 중 한국 여성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소재로 쓴 소설 ‘새해’(1968), 6·25전쟁 중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한국 여인의 삶을 담은 단편 ‘한국에서 온 두 처녀’(1951)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