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라이프

“미친 늙은이”라더니... 미국, 이승만 결단에 감동한 이유 <반공포로 석방사건 下편>

¬ìФ´ë지

<반공포로 석방사건 上편>에서 계속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한 1951년 6월 이후 휴전 반대와 북진 통일은 국민적, 초당적 지지를 받고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를 이승만 대통령의 망상적, 극단적 주장이었던 것처럼 왜곡해 왔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앞선 영상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승부수 ‘반공 포로 석방’은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국민적 지지가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상상치도 못한 반공 포로 석방에 아연실색한 미국은 덜레스 국무장관 주재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합니다. 2시간 반의 회의가 끝난 뒤 덜레스는 이승만 대통령과 40분에 걸쳐 통화해 유엔군사령부에 대한 권한 침해라며 비난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잠을 자다 포로 석방 소식에 급히 깨어났습니다. 훗날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8년 중 자다가 일어난 것은 이날이 유일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부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배반’이라는 전문을 발송합니다. ‘이 전문은 극히 단문인 것으로 전해졌다’고 당시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배반’이라는 한 문장짜리 전문은 아이젠하워의 분노를 잘 보여줍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정전협정을 고의로 망치려는 이승만의 대담한 시도는 상상 이상이며, 이 고집 센 노인은 수백만 명의 희망을 무너뜨린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보내 무려 37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나라였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을 장악했던 나치에 혼자 맞서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았던 처칠 영국 총리지만 반공 포로 석방 소식을 듣고는 면도를 하다 얼굴을 베었습니다. 6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사 제목은 ‘영국 수상 대경실색(얼굴색이 달라질 만큼 크게 놀람)’이었습니다. 영국 외무성 대변인은 ‘처칠 총리가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했다’고 발표했습니다. 22일 열린 영국 하원 회의에서 처칠은 반공포로 석방을 ‘배신’이라고 규정했고, 의원들은 직함을 빼고 ‘이승만 씨’라고 호칭하며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3년간 함께 피 흘리며 싸운 맹방들이 배신자라며 분노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도 태연자약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 1주일 뒤 이 대통령을 면담한 장택상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 박사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러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은 솔직한 고백을 할 테야. 일생을 통해 감옥을 드나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한 나야. 그런데 이번 반공 포로 석방 후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 내 개인으로서야 설혹 불행해진다 하더라도 관심 밖의 일이야. 무엇보다 국운이 풍전등화인데 나라가 망하지나 않나 해서 실은 무척 초조했어⋯’ 말을 채 맺지 못하는 그의 눈시울에는 평생 처음 이슬방울이 비치는 것이었다. 낙루(落淚) 직전의 아슬아슬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평생 후회가 없는 이 박사였지만, 약소국가의 원수로서 분명 주권을 행사하고 나서 적지 않게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이 박사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일촉즉발의 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벼랑 끝 승부수는 완벽하게 주효했습니다. 휴전이 절박했던 소련과 중공의 반발 수위는 예상보다 크게 낮았습니다. 휴전회담의 판을 깨고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미국과 영국도 충격을 가라앉힌 뒤에는 현실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 처방도 불사한 이승만이 실제로 북진통일 작전을 실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맥스웰 테일러 미8군사령관이 ‘한국군이 단독 북진을 불사한다면 유엔군은 안전하게 후방으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해야 했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휴전협정을 체결하더라도 한국의 독자 행동으로 모두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25 남침이 시작된 지 정확히 3년 되는 날이자 반공포로 석방 1주일 뒤인 1953년 6월 25일.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방한합니다.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방한 대표단에 포함되자 국내외에서는 ‘상호방위조약’이 의제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습니다. 로버트슨은 7월 12일까지 무려 18일간 한국에 머무르며 매일 한 번 이상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벌였습니다. 당시 국무총리로 회담에 배석한 백두진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로버트슨의 방한 목적은 이 대통령을 설득해 강경한 태도를 무마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이 대통령의 태도는 때로는 흥분하고 때로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간혹 낙루하거나 냉담한 품이 변화무쌍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회담은 줄다리기를 거듭했습니다. 변영태 외무장관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남은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회담을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의 숙소인 내자호텔 앞에서는 날마다 서울시민들의 휴전 반대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18일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마침내 ‘한국의 주권 행사를 인정하고, 한국은 휴전협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이뤄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북 자유 동포를 구출해야겠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적 권리 행사에 속한다. 어느 누구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전 협정의 서명국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는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7월 12일 발표된 공동성명은 ▲휴전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한국에 대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 실시 및 우선 2억달러 제공 ▲한국군 증강을 계획대로 진행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휴전 조건에 대한 한국의 요구가 사실상 100% 수용된 것입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극적 합의이자 역사적 합의였습니다. 귀국한 로버트슨 차관보는 의회 보고서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한마디로 그의 주장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다. 우리 동맹국들 모두가 그의 정신을 지녔다면 세상은 덜 시끄러울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8월 8일 중앙청 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 상호 방위 조약 가조인식이 열렸습니다. 10월 1일에는 워싱턴에서 상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됐습니다. 한국에 대한 장기적 경제 원조 제공과 한국군 20개 사단과 해·공군력 증강도 함께 합의됐습니다. 이 대통령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성립으로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에 힘입어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이 조약은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은 지금까지도 주한 미군 2만8000여 명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공격받으면 미국이 공동 방어한다는 조약은 우리의 안보를 튼튼하게 지켰고, 그 토대 위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생존하고 성장하고 발전했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주한 미군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을지 자체가 미지수입니다. 이 조약을 통해 우리가 절감한 누적 국방비는 최소 수천조 원의 천문학적 액수로 추정됩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합의된 미국의 경제 원조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 예산에서 미국 원조는 한때 86%에 달했고, 1957년에 이르러도 정부 예산의 53%가 미국 원조였습니다. 무상 원조 규모만 해도 현재 화폐 가치로 수백조 원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한 한국군 현대화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세계 군사력 6위 국가가 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때 석방된 2만 6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입니다. 이때 풀려나지 못했다면 이 청년들은 김일성 치하 북한으로 끌려가 비참한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이 청년들은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미국 정부로부터 제거 대상으로 검토되고, 미 의회와 언론이 ‘미친 늙은이’라고 비난했던 이승만은 불과 1년 뒤인 1954년 7월 26일 미국을 방문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직접 환영을 나왔습니다. 백악관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오픈카 퍼레이드가 펼쳐져 수만 명의 미국인이 환호를 보냈습니다. ‘고집 센 노인은 반공 포로 석방에 책임지라’는 사설을 썼던 워싱턴포스트는 1면 기사로 이 장면을 보도했습니다. 3부 요인과 대법원 판사 전원, 3군 수뇌부 전원이 참석한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는 33번의 기립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8월 2일 뉴욕 맨해튼 ‘영웅의 거리’에서 또 한 번 오픈카 퍼레이드가 펼쳐졌습니다. 맥아더 장군 등 미국 영웅들에게만 주어지던 이 영예를 다른 나라 국가 원수가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브로드웨이부터 뉴욕시청까지 이어진 30여 대 차량 행렬에 고층 빌딩에서는 오색 테이프와 종이꽃이 쏟아져 내렸고 15만 미국인(미 언론 보도)이 연도에 나와 열광적 환호를 보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세계 곳곳으로 팽창하던 공산주의를 최전선에서 막아내고,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젊은이들을 살리려고 전 세계와 맞서기까지 했던 노 지도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¹ì‹ 2026´ëª…궁금˜ì‹ ê°€

지ê¸ë°”로 AI가 분석˜ëŠ” 가•교¬ì£¼ 리포¸ë 받아보세

´ëª… œë‚˜ë¦¬ì˜¤ •인˜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