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02년 3월 9일 68세
삐에로처럼 분장하고 가슴엔 브래지어를 찬 모습으로 퍼포먼스하던 중광스님의 80년대 모습.
1981년 11월 첫 작품전을 앞둔 화가 중광(본명 고창률·1934~2002) 스님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피카소보다 내가 낫지”라고 기염을 토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생각과 기교로 차 있지만 내 그림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무심선필(無心禪筆)이지.”
제주도가 고향인 중광은 1960년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불교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으로 1979년 승적이 박탈됐다.
중광 스님 작품./제주도
“불문(佛門)에 들어선 그는 몇 년 동안 꼼짝 않고 참선에 몰입했다. 마침내 “참선하는 것과 참선하지 않는 것 사이의 상이점이 없는 날”이 왔고 그날부터 중광은 ‘무애(無碍) 행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나는 불교계의 걸레다. 걸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만들지만 그 자체는 더욱 더러워진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
걸레 도사는 방황을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랑하고 담배를 피우고…. 세상은 그를 미친 중, 돌중, 파계승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지만 그의 기인(奇人) 행각은 요즘도 여전하다.”(1981년 11월 22일 자 7면)
중광 스님 인터뷰. 1981년 11월 22일자 7면.
승적 박탈 후에도 ‘무애 행위’ ‘기인 행각’은 이어졌다. 성기를 노출시킨 동물 그림을 발표하고 ‘나는 똥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자신의 성기에 붓을 달아 그림을 그리고, 외국 대학 강연 중 여학생과 키스했다. 영화 ‘허튼 소리’(1986), ‘청송으로 가는 길’(1990) 주연으로도 출연했다.
“그의 예술세계는 외국에서 먼저 인정 받았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77년), 버클리대학(80년), 록펠러재단(83년) 등에서 선화(禪畵)와 선시(禪詩)를 발표하면서 주목받은 것. ‘걸레 스님’이란 별칭도 1977년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초대전에서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붙었다.”(2002년 3월 11일 자 23면)
2002년 3월 11일자 23면.
“그를 화승(畵僧)으로 발견한 사람은 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동양학과장 루이스 랑카스터 박사였다. 그는 한국 불교 연구차 내한했다가 중광을 만났고, 그의 인간과 그림에 반해 자진하여 중광의 선서화집(禪書畵集)을 미국에서 출간했다. ‘미친 중-무애선필화(無碍禪筆畵)’라는 제목의 이 책으로 중광의 그림은 세계 각국에 소개됐고, 중광도 봇짐 하나를 메고 구미(欧美)를 순회했다. 랑카스터 박사는 중광을 가리켜 ‘한국의 피카소’라고 했다.”(1981년 11월 22일 자 7면)
2000년 1월 21일자 28면.
2000년 마지막 전시회 주제는 ‘괜히 왔다 간다’였다. 최근작인 달마도 40여 점, 과거 그린 유화 20여 점, 도자기 40여 점을 냈다. 이때 인터뷰에선 예전 ‘기인 행각’과 전혀 다른 ‘정상인’ 같은 모습을 보였다.
“―과거엔 반말투에 거침없는 열변을 하셨는데 존대말을 하시네요.
“정상인처럼 말하지요? 과거엔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행동했는데 술·담배를 끊어서 그런가 보지요. 한창 때는 시인 구상이나 화가 이중섭·박고석 등과 어울려 막걸리통에 소주 부어 마셨는데 건강 때문에 술은 4년 전에, 담배는 두 달 전에 끊었습니다.”
―말도 아끼시네요.
“깊은 진리는 짧은 것, 긴 말이 필요 없지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나도 그림을 팔아야 하는데 가짜가 선수를 쳐 고달프지요. 그림 값도 안 비싸요. ‘42호’에 400만원쯤 하나 그래요.””(2000년 10월 21일 자 28면)
1985년 12월 14일자 7면.
언론인 이규태는 중광 사후 ‘이규태 코너’에서 “그는 장애인·매춘부와 어울려 살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산산이 부서지고 없어서 너무 고독해서 춤을 추는 것이라고 자신의 기행을 변명했다”면서 “스스로를 미친 척 소외시켜 정상인이 아닌 아웃사이더로 자처하고 살았던 자회(自晦) 인맥의 현대판”(2002년 3월 12일 자 7면)이라고 평가했다. 김시습, 정희량, 남효온, 이지함, 김삿갓을 잇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