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현대미술 악동’ 데이미언 허스트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 내일 개막
데이미언 허스트가 18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서 입을 쩍 벌린 상어 앞에 앉아 익살스럽게 입을 크게 벌렸다. 허스트의 1991년작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 아시아 최초로 전시됐다. /뉴시스
입을 쩍 벌린 상어가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푸른 수조 안에 떠 있다. 금방이라도 관객을 덮칠 듯 위협적이지만 이미 죽어 박제된 상태다. 전시장 반대편엔 피가 흐르는 잘린 소 머리와 전기 살충기, 파리 유충이 유리관 속에 들어 있다. 부화한 파리는 피 냄새를 맡고 소 머리로 날아들지만 결국 살충기에 걸려 죽고 만다.
‘충격과 엽기의 미술가’ ‘현대미술의 악동’ 데이미언 허스트(61)가 서울에 상륙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허스트의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가 20일 개막한다. 초기작부터 최근작 ‘벚꽃’ 그림까지 50여 점을 통해 40년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허스트는 2주 전 서울에 도착해 전날 밤늦게까지 설치 작업을 이끌었지만, 18일 언론 공개회에선 “작품 자체에 메시지가 담겨 있으니 질의응답은 갖지 않겠다”는 말만 남기고 출국장으로 떠났다.
피 흐르는 잘린 소머리와 파리를 통해 생명의 순환을 잔혹하게 보여주는 ‘천년’(1990)이 전시된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난 허스트는 반항심 가득한 청년기를 보내며 그림을 유일한 탈출구로 삼았다. 1988년 골드스미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23세에 직접 기획한 그룹전 ‘프리즈’를 통해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모인 작가들이 YBA(Young British Artists)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주축으로 떠오르면서, 이 전시는 영국 미술의 지형을 바꾼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그는 죽은 소 머리와 살아있는 파리를 이용해 생명의 순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천년’(1990),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절인 상어를 유리 수조 안에 전시한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을 연달아 발표하며 현대미술계 중심에 떠올랐다. 이 ‘자연사’ 연작으로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하고, 1995년 터너상을 받았다. 모두 20대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 전시에 두 작품을 들여온 미술관은 “특히 미국 뉴욕의 수집가가 소장한 ‘상어’는 대여에만 6개월 걸렸다. 상어와 수조를 각각 항공으로 운송해 설치하기까지 가장 애를 먹은 작품”이라고 했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18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서 대표작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앞에서 상어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뉴스1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허스트는 과거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과의 인터뷰에서 “일곱 살 때부터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유지하느라 바빴고 성당에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달았다. 유요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상어는 언제 어디서 인간에게 닥쳐올지 모를 죽음의 위협을 나타내는 한편,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 자체를 가리킨다”며 “상어와 인간 모두 결국 비루한 유한성 속의 존재”라고 해석했다.
왼쪽엔 스핀 페인팅 연작, 오른쪽엔 칼날 위로 비치볼이 둥둥 떠다니는 '사랑의 취약성'이 전시됐다. /연합뉴스
데이미언 허스트가 인간 두개골 형상에 다이아몬드 8601개를 박은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를 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백금으로 주형을 뜬 인간 두개골 형상에 다이아몬드 8601개를 촘촘히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도 이번 전시 볼거리다. 두개골의 치아는 18세기 인물로 추정되는 실제 인간 해골에서 가져왔다.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과 영원한 아름다움의 상징인 다이아몬드를 결합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삶의 무상함을 표현했다. 2007년 익명의 투자자 집단이 5000만 파운드(약 990억원)에 구입했다고 알려졌지만, 작가 자신이 투자자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가짜 마케팅 논란’이 일었던 작품이다.
전시장에서 한 관계자가 알약이 빼곡하게 진열된 작품 '무한을 위한 원형'을 촬영하고 있다. /뉴시스
알약이 빼곡하게 진열된 작품 '무한을 위한 원형' 옆에 서 있는 데이미언 허스트. /국립현대미술관
알약이 빼곡히 진열된 ‘약장’이 종교적 성물처럼 전시되고, 수천 마리의 나비 날개를 사용한 삼면화가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설치됐다. 멀리서는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잔혹한 역설이 드러난다. 이사빈 학예연구관은 “허스트는 의학에 대한 맹신, 그 이면에 깔린 영생의 욕망, 이를 작동하게 하는 시각적 요소들에 주목한다”며 “종교와 과학, 예술의 미묘한 접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작가의 런던 작업실을 통째로 옮겨온 마지막 공간에서 데이미언 허스트가 물감 묻은 소파에 앉아있다. 작업 중인 미완성 회화들도 고스란히 공개됐다. /연합뉴스
일각에선 “한물간 작가” “흥행에만 집중한 상업 전시”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에 대한 미술관 답이 전시 마지막 공간에 있다. 런던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통째로 옮겨왔다. 물감 묻은 바닥까지 그대로 뜯어왔고, 허스트가 쓰던 붓과 페인트, 작업복과 함께 전시 직전까지 작업하던 미완의 회화들도 고스란히 공개됐다. 송수정 전시과장은 “허스트는 우리가 모두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작품 진본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현재 진행형’인 이 작가를 언젠가 한 번 봐야 한다면 지금이 제일 적절하고 빠른 시점”이라고 했다. 6월 28일까지. 관람료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