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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기업인 정주영, 경영의 비결은 ‘사람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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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01년 3월 21일 86세

정주영 창업회장

1970년 6월 30일자 조선일보 6면은 경부고속도로 완공 축하 지면이었다. ‘하늘에서 본 ‘민족 의지’의 동맥’이라는 제목으로 경부고속도로 사진을 10단 크기로 실었다.

1970년 6월 30일자 6면.

‘하이웨이 천리, 달리는 일일 생활권’ 제목의 기사 옆 사진에 유공자 명단이 실렸다. 건설부 장관 이한림과 한국도로공사 사장 허필은에 이어 공사에 참여한 10곳 건설사 및 대표 이름을 줄줄이 적었다. 그중 가장 먼저 쓴 이름은 현대건설 대표이사 정주영(1915~2001)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 유공자를 선정했다. 모두 119명으로 “사상 최대 규모 훈장 수여식”(1970년 7월 4일자 4면)이었다. 정주영은 그중에서 혼자 민간인 중 최고 훈장인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경부고속도로 완공에 가장 기여한 기업인이라는 뜻이었다.

1970년 7월 4일자 4면.

1970년 8월 11일자 4면.

한 달 후 박정희 정부는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4대 중공업(조선·중기계·특수강·주물선) 공장 중 조선소 실수요자로 현대건설을 선정했다. (1970년 8월 11일자 4면)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8남매 장남으로 어릴 때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고 소학교에 다닌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 19세 때 서울의 쌀가게에 취업해 일하다가 1938년 가게를 인수했다. 해방 후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현대건설 전신)를 설립했다. 이후 20년 만에 ‘재벌’ 소리를 듣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1971년 2월 5일자 4면.

정주영은 1971년 2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경영 비결로 유능한 인재를 적소(適所)에 배치하는 ‘사람의 구성’을 꼽았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자수(自手)로 일가를 이룬 재벌답게 ‘사람의 구성’이 경영의 열쇠라고 강조한다. “뭐니뭐니해도 기업은 자본과 배경보다는 사람이 경영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능한 경영자일수록 유능한 사람을 모아놓게 되지요. ‘사람의 구성’만 제대로 되면 국내에서 사업을 벌이든 밖(해외)으로 나가든 기업은 성공합니다.””

유능한 인재를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한편 정실 인사는 철저히 배제한다고 했다.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 과제를 많이 줘서 승진시키는 것이 제 경영 방침입니다. 말단 사원이라도 아이디어를 내면 제때에 정확한 가부를 결정해 주지요. 가급적 사기를 돋아주는 인사제도도 확립했고요. 우리 회사의 인사제도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도록 되어 있읍니다. 진급 및 승급의 기준이 뚜렷하고… 아무리 높은 사람이 부탁해도 정실인사 못하도록 만들었읍니다.”(1971년 2월 5일자 4면)

1975년 7월 19일자 2면.

제1차 오일 쇼크 직후인 1975년 7월 인터뷰에서는 불황을 탈출하는 경영 전략으로 ‘사원의 일체감’을 강조하고 자동차를 해외에 수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피력했다.

“현대그룹은 성실하고 추진력있는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리고 두뇌집단이라는 평가를 받도록 노력하고 있읍니다. 저는 특히 사원 각자가 일체감(一體感)을 갖고 맡은 일을 밀고 나가도록 유도하고 있읍니다. 만약 일체감이 없었다면 허허벌판인 모래밭(울산조선소)에서 공장을 건설하면서 26만t급 대형 유조선을 동시에 건조, 수출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수출이 어려울 것이라고,걱정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년쯤에는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해외에 수출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외국 사람들도 품질 및 가격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나 생산시설을 국제화하고 기술적인 문제점을 극복해서 수출 첫 해부터 그와 같은 걱정과 우려를 말끔히 씻어놓겠읍니다.”(1975년 7월 19일자 2면)

1977년 4월 30일자 2면.

1977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13대 회장으로 취임해 17대까지 10년간 재임했다. 취임 인터뷰에서 “앞으로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가증 큰 과제는 종업원의 처우 개선”이라며 “기업인의 사명은 종업원들에게 높은 임금을 주면서 생산성을 높여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만드는 것”(1977년 4월 30일자 2면)이라고 강조했다.

정주영은 1991년 “당초 약속한 대로 오는 93년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면서 “정계에 직접 진출하지는 않고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뒤를 밀어줄 생각”(1991년 12월 10일자 7면)이라고 했다.

1991년 12월 10일자 7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국회 31석을 얻었다. 그해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16.3% 득표로 낙선했다.

2001년 부음 기사는 “자수성가한 대그룹의 오너로서, 존경받는 재계 지도자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이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정치에 발을 디디면서부터”라고 지적했다.

“낙선 후 그와 현대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혹독했다. 93년 5월부터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범정에 서야했고, 현대그룹은 산업은행 등 금융기관의 자금줄이 완전히 막혀버려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 회장이 YS 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5월 ‘현대그룹 해체오 소유·경영 완전 분리’를 천명했던 것도 정치참여에 대한 후유증 때문이었다.”(2001년 3월 22일자 5면)

2001년 3월 22일자 5면.

이밖에도 ‘대북사업의 조급증’과 아들 사이 분쟁인 ‘왕자의 난’, 그룹주력사 부도 위기 등으로 “정 회장은 우울한 말년을 보낸 셈”이라고 적시했다.

정주영의 일생을 한 줄로 요약한 부음 기사 제목은 ‘10대에 맨주먹 상경… ‘현대 신화’ 일군 불도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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