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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6·25, 8·15… ‘기념시’도 많이 쓴 ‘나그네’ 시인 박목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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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78년 3월 24일 63세

시인 박목월

박두진·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낸 서정시인 박목월(본명 박영종·1915~1978)은 1960년 4월 26일 자 조선일보 석간 2면에 ‘4·19 승리’의 감격을 담은 시를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날이었다. 하야 성명은 이날 오전 10시. 신문사 청탁을 받고 마감 시간에 맞추려고 2~3시간 내에 서둘러 썼을 것이다. ‘동이 트는 순간을’이란 제목의 긴 시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쓴 시인의 시답지 않게 격정적이다.

박목월 시 '동이 트는 순간을'. 1960년 4월 26일자 2면.

‘그대 민주주의의 기수여. / 정의의 불기둥이여. / 바로 엊그제까지/ 눈이 팔팔하게 살았던 젊은이여. / 이제는 무덤 아래 누웠는 그대들 귀에도 들리는가. / 거리에 울리는 이 ‘중대 방송’의 구절구절이/ 피로써 잡아온 민의의 승리가./ 피로써 절규한 구호가 그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는 이 순간을. (…)’(1960년 4월 26일 자 석간 2면, 박목월 ‘동이 트는 순간을’ 일부)

박목월은 향토성 짙은 언어로 시를 쓴 서정시인으로 유명하지만 역사의 순간을 되짚는 ‘기념시’도 여러 편 썼다. 앞서 1958년 8월 15일자에는 ‘다시 8·15의 감격을’이란 제목의 시가 실렸다.

1958년 8월 15일자 8면.

‘그것은/ 영원한 감격의 메아리./ 마음이 괴롭고/ 길이 막힐 때/ 조용히 되살아나는/ 그윽한 속삭임/-그날을 생각하라/-그날의 감격을 생각하라고.// 이제는 밖으로 뛰어나가/ 만세를 부르지 않아도 좋다./ 되돌아 온 하늘의/ 그 광명이/ 안으로 스스로 비쳐울뿐./ 스스로 나를 밝게할 뿐.(…)’(1958년 8월 15일자 8면)

6·25를 주제로 한 기념시도 기고했다. ‘빨갱이’ ‘이리’ 같은 서정시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시어가 눈길을 끈다.

1960년 6월 25일자 4면.

‘여보./ 사·일구 때 선봉을 선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이 납치되던 해/ 국민학교 졸업반이었지요./ 그 아이는 자랄수록/ 당신을 닮는구려./(…)/여보오./ 부르면 대답이라도 들릴 듯한/ 아아 그곳은/ 빨갱이들, 이리의 소굴(…)’(1960년 6월 25일 자 4면. ‘돌아오는 6·25’ 일부)

박목월이 기념시에서 드러낸 정치 성향을 굳이 규정하자면 공산주의 및 북한에 반대하고 독재에 저항하는 ‘반공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유당 정권에 항거했던 4·19의 승리에 감격했던 이 ‘반공 민주주의자’는 이승만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애도시를 썼다. 서거 이튿날 이승만의 젊은 시절부터 하야 이후까지 전면을 사진 화보로 꾸민 지면에 ‘그분은 눈감았네’라는 제목의 시가 실렸다.

1965년 7월 13일자 3면.

‘살아서 허물은/ 죽음으로 다 벗고/ 누구나/ 눈감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 그분은/ 눈감았네/ 나라를 사랑하는/ 한 줄기 붉은 마음/ 우리 겨레 위에/ 찬란히 뻗쳤네/ 아 그분은 눈감았네/ 일제의 쇠사슬에/ 얽매인 겨레가/ 어둠과/ 절망 속에 헤매일때/ 높이/ 불을 밝혀/ 앞길을 비쳐주고/ 이국 땅/ 된서리와 사나운 바람에/ 바랜/ 백발을/ 광복 조국에/ 웃으며 돌아오던/ 아/ 그분은/ 눈감았네(…)’(1965년 7월 20일 자 3면)

한양대 교수였던 박목월은 1965년 한일 수교 반대 성명에 참여하고 그 이유에 대해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일개의 서생에 불과하지만 국제 정의로 보아, 당연히 물어주어야 할 ‘배상(賠償)’에 대하여 ‘무상 원조’라는 미명(美名)을 굳이 씌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엄연히 우리의 국토인 독도에 대하여 그 영토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엇인가.”(1965년 7월 13일 자 3면)

1973년 2월 25일자 5면.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을 때 조시(弔詩)를 썼다. 2년 후 전기 ‘육영수 여사’도 출간했다.

“고 육영수 여사의 2주기에 맞춰 15일 발간되는 여사의 전기 ‘육영수 여사’의 저자인 시인 박목월씨는 육 여사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그분의 높은 인격을 더 깊게 느꼈다고 말했다. (중략) 자신도 코허리가 시큰하도록 감동적인 장면이 많았지만 애써 객관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책이 나오고 보니 너무 냉정하지 않았나 오히려 아쉽다고 했다.”(1976년 8월 15일 자 4면)

그러나 시인 박목월의 본령은 서정시다. 부고 기사는 ‘향토성 짙은 순수시의 대표적 작가’라고 제목을 달았다. 1978년 3월 24일 아침 산책 나갔다가 쓰러져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청록파 3인으로 조지훈에 이어 박목월을 먼저 보낸 박두진은 조시 ‘시인 중의 시인’을 써 애도했다.

1978년 3월 15일자 5면.

‘목월, 목월이 가다니 이상하다/언제나 만날 수 있었고/언제나 거기 있었는데/(…)/청록파 그중에도/가장 그 사슴 같던/ 여리 여린 목월./ 정말 20대 청년 적엔 청초했던 목월,/ 깜말랐던 목월,/ 다정했던 목월,/(…)/시인 중의 시인/ 목월이 가다니/ 아, 목월을 갔지만/언제까지나 그의 시는 남아서/우릴 울리리/ 북에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목월이/아니라/한국의 목월로서 길이 울리리(…)’(1978년 3월 25일자 5면)

2003년 ‘박목월 시 전집’(민음사)이 출간됐다. 어린 시절을 보낸 경주에 소설가 김동리와 함께 박목월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동리목월문학관’이 2006년 개관했다. 2024년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목월의 육필 노트와 미발표시 166편을 공개했다.

2024년 3월 13일자 A18면.

박목월은 별세 5년 전 40년 시작(詩作) 생활을 정리한 ‘자선집(自選集)’ 10권을 내고 인터뷰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붓 하나로 살겠다”면서 “지금까지는 트레이닝의 과정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며 출발”(1973년 2월 25일 자 5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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