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공통 경험의 종말
남녀 주인공 역할 바꾼 AI 편집본, 요약 영상을 2배속으로 본다
‘중경삼림' 배우도 유덕화… 원본 고집하면 ‘순정주의자’ 조롱도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그래픽=이철원
“진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젊을 때 잘생겼더라. 영화 내내 얼굴밖에 안 보이던데. 엄마는 그 영화를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본 거야?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응. 초등학생 때. 원래 엄마 나이에는 볼 수 없는 영화였는데 당시에는 그런 걸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지 않았어. 영화가 길어서 중간에 화장실 어떻게 가야 하나 걱정했었지.”
“나중에 로즈 죽을 때 레오가 눈물 또르륵 흘리는데 나도 오열했잖아. 케이트 윈슬렛도 진짜 멋있더라.”
“응? 로즈가 죽는다고?”
“응. 바닷물에 가라앉아서 죽잖아. 그거 죽는 거 아냐? 그때 주제가가 흐르고, 레오가 자기는 앞으로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주영은 딸과 이야기하다 화들짝 놀랐다. 딸이 봤다고 주장하는 영화 ‘타이타닉’에서 1등실 승객은 로즈가 아니라 잭이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잭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자유분방한 3등실 승객이 로즈였다. 딸이 봤다는 영화는 두 주인공의 역할이 바뀐 타이타닉이었다. 누군가 AI로 만든 성반전 버전 타이타닉을 동영상 플랫폼에 올렸고, 그게 딸 또래 세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모양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 우연한 기회로 티켓을 구해 타이타닉호에 올라탄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화가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막강한 재력의 약혼자와 함께 1등실에 승선한 ‘로즈’(케이트 윈슬렛)에게 첫눈에 반한다. /씨네힐
심지어 주영의 딸은 그 타이타닉조차 제대로 본 게 아니었다. 잭과 로즈가 사랑하기까지는 1분짜리 쇼츠 몇 개로 본 셈 쳤고, 타이타닉이 가라앉는 장면은 재난 영화 전문 유튜버의 설명 영상으로, 잭과 로즈의 연애 장면은 ‘PV’라고 하는 팬 제작 뮤직비디오로 봤다고 했다. 나머지 장면들은 AI 에이전트에게 알아서 요약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2배속으로 봤다고 했다. “3시간 넘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봐” 하고 딸이 진지하게 말할 때 주영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요즘 애들 다 그래. 우리 애가 ‘중경삼림’을 봤다기에 반가워서 얘기를 듣는데 아무래도 뭐가 이상한 거야. 유덕화 얘기를 하기에 내가 그 영화에 유덕화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3부에 나온다고 하더라고. 나중에 알아보니까 누가 AI로 ‘중경삼림 최종판’이라는 팬메이드 영상을 만들었나 봐. 그리고 ‘타락천사’의 주연 배우를 유덕화로 바꾼 다음 짜깁기해서 중경삼림에 덧붙였나 봐. 그 중경삼림 최종판을 또 다른 사람이 요약본으로 만들었는데 우리 애는 그걸 본 거지.”
선주가 말했다. 주영, 선주, 희선, 그렇게 세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 커피점에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대학 동기인 그들은 40대 중반 이후 첫아이를 얻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 ‘공경’은 끝났다고.”
희선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이게 어른 공경하는 마음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게 아니고, ‘공통 경험’을 줄여서 공경이라고 부른대. 이제 내가 본 영화랑 다른 사람이 본 영화가 같은 영화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대. 누가 어떤 영화 보고 울었다, 인생 영화다, 그런 말을 해도 그건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들어야 하는 거지. 요즘 애들은 원본 감상을 고집하는 사람을 ‘순정주의자’라고 부른대.”
“그건 너무 기괴하다. 원작에 대한 예우도 아닌 거 같고, 서로 같은 경험을 하고 감상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주영은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렇게만 말했다.
“모르지, 뭐. 우리 어머니는 오히려 자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거라고, 옛날에는 그렇게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던데.”
희선의 말에 주영과 선주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렸을 때는 가정용 영상 재생 장치가 아예 없었잖아.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는 TV로 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방영 시간이 밤이니까 어린이들은 그조차도 못 봤대. 가끔 운 좋게 어떤 영화를 본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말로 영화 내용을 설명하면 그걸 모여서 들었대. 그런데 워낙 검열이 심한 시절이었잖아. 한국 방송사가 멋대로 가위질한 작품을, 다른 아이가 제 나름대로 소화해서 말하는 버전을 듣고 영화를 멋대로 상상한 거지. 플랫폼이 편집한 작품을 유튜버가 전하는 버전으로 보는 감상법이랑 똑같잖아.”
“옛날 아이들은 언젠가 원작을 봐야겠다는 마음 정도는 품었을 걸. 요즘 애들은 원작을 왜 봐야 하느냐고 물어.”
주영이 반박했다.
“정작 우리도 감독이 만든 그대로 영화를 보지는 않잖아? 너희는 영상을 1배속으로 봐? 나는 늘 1.5배속으로 보는데. 그런지 10년은 넘었어.”
희선이 말했다.
“나도 1.5배속으로 보기는 해. 그리고 피를 못 보겠어서 피를 검은색으로 바꾸는 필터만 설정했어. 하지만 그거 말고는 원작대로 봐.”
“원본 감상을 고집하는 관객을 순정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했지? 그들 기준으로는 너도 원작을 훼손하는 거야.”
희선이 핀잔을 줬다.
“그래도 난 ‘벤허’의 검투 장면 같은 건 그대로는 못 보겠어. 피라도 검은색이어야 해.”
주영이 몸을 떨며 말했다.
“벤허에 검투 장면이 나와?”
“벤허랑 로마 황제가 콜로세움에서 칼싸움을 하잖아. 노예들의 봉기가 실패한 다음에....”
이야기를 나눌수록 주영이 본 벤허에는 ‘글래디에이터’와 ‘스파르타쿠스’가 섞여 있음이 명확해졌다. 희선과 선주가 깔깔거리며 웃는 동안 주영은 붉어진 얼굴로 자기 동영상 플랫폼의 AI 도우미 설정을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면서.
‘1950년대에 나온 영화인데 상영시간이 3시간 반이 넘는다고.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리지널 버전으로 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