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75년 3월 25일 69세
사우디아라비아 3대 국왕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1975년 3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3대 국왕 파이살(옛 표기 파이잘)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906~1975)는 무함마드 탄생 행사에서 권총 저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범인은 조카였다.
“아랍 세계의 강자이고 친(親)서방 지도자이며 17년간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다스려온 파이잘 왕(王)이 25일 그의 조카 파이잘 이븐 무사에드 이븐 압델아지즈 공(公)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됐다. 파이잘왕(69)은 모하메드 탄생일인 이날 그의 궁내에서 하객들을 접견 도중 그에게 가까이 접근한 아지즈 공의 권총 수 발을 맞고 쓰러진 뒤 급히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으나 곧 운명했다.”(1975년 3월 26일자 1면)
파이살 사우디 국왕 피살. 1975년 3월 26일자 1면.
범인인 조카 파이살 빈 무사이드는 정신질환자로 발표됐다. 한때 CIA 음모론 등이 나왔으나 배후 없는 단독 범행으로 결론이 났다. 범인은 석 달 후인 6월 18일 수도 리야드 광장에서 수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금의 칼’로 참수형(1975년 6월 19일 자 3면)을 당했다.
파이살 국왕은 1964년 11월 이복 형인 2대 국왕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를 쫓아내고 즉위했다. 1958~1960년, 1962~1964년 실세 총리로 있다가 왕위에 올랐다. 사우드 국왕은 그리스로 망명 후 1969년 타계했다.
1964년 4월 1일자 4면.
파이살은 현대 사우디 국가 건설을 이끈 국왕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목민 부족 사회를 서서히 현대 국가로 발전”시키고 “73년 10월 중동전(戰) 때 중동 석유를 정치 무기화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으며 어느 다른 아랍 지도자보다도 큰 영향력을 국내외에 행사”(1975년 3월 26일 자 3면)했다.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복지정책을 펼쳤다.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여성 교육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4년 12월 올해의 인물로 파이살 국왕을 뽑았다.
1975년 3월 27일자 3면.
파이살 국왕 피살 직후 조선일보는 프랑스 전기 작가 브누아 메샹의 글을 옮겨 ‘석유 거인 파이잘 스토리’란 제목으로 파이살 국왕의 삶을 4회 연재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윤경도 주(駐)사우디 대사는 1975년 12월 인터뷰에서 “세계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아랍 세계에서의 한국의 대변인’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 가깝다”면서 “우리가 오만, 카타르와 수교한 것도 사우디가 주선해 준 것”(1975년 1월 29일 자 3면)이라고 밝혔다.
"사우디는 한국 대변인" 1975년 1월 29일자 3면.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합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면서 탄생했다.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의 아들들이 형제 승계로 현재까지 왕위를 이어가고 있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유력 부족의 딸들과 혼인해 최소 22명의 아내를 맞이했다. 아들만 45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75년 1월 7일자 3면.
피살된 파이살 국왕을 이어 동생 칼리드가 왕위를 승계했다. 현재 7대 국왕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25번째 아들이다. ‘빈 살만’으로 국내 언론에 잘 알려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살만 국왕의 아들이다. 빈 살만이 왕위를 승계한다면 처음으로 3세대 국왕이 탄생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