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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 차별 항의 ‘김의 전쟁’ 권희로, 귀국 후 범죄에 日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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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10년 3월 26일 82세

1999년 9월 8일자 1면.

1968년 2월 21일 재일교포 2세 김희로(개명 권희로·1928~2010)는 일본 시즈오카현 온천마을 하다하라의 한 온천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전날 밤 시미즈시(市) 클럽 밍크스에서 채권자의 빚을 독촉하던 야쿠자 둘을 장총으로 쏴 살해하고 45㎞ 떨어진 온천여관으로 들어갔다. 김은 야쿠자들에게서 “조센징, 더러운 돼지 새끼”라는 말을 듣고 격분해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김은 이날 아침 TV 생방송 프로를 통한 전화 인터뷰에서 자기는 1200발의 탄약과 150개의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으며 경찰이 재일교포들에 대한 학대 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한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는 또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어릴적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는 사실이 있다. 나는 아직도 나를 차별했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968년 2월 22일자 조간 7면)

1968년 2월 22일자 7면.

김희로는 인질극을 통해 재일 조선인 차별 중단을 요구해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인질에겐 친절하고 우호적으로 대했다. 김은 인질 3명을 “가족들이 근심하고 있고 얼굴이 창백하다”며 내보내면서 “미안하다”고 일일이 악수했다. 인질로 잡혔던 여관 주인은 풀려났다가 다시 여관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인질극은 88시간 만인 24일 오후 3시 25분 끝났다. 김희로는 여관 현관으로 나와 인질 1명을 더 내보내면서 기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돌아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기자들 틈에 있던 사복 경찰이 김희로를 덮쳤다.

김희로 체포. 1968년 2월 25일자 7면.

“김의 체포 광경은 때마침 현장을 지키던 TV 카메라에 잡혀 90분 후 일본 전국에 방송되었다. 경찰은 이때 현관 가까이에 모여 있던 약60명의 기자들 틈에 사복을 하고 끼여 있었다. 김은 기자들에게 몇 마디 하고 돌아설 때, 날쌔게 달려든 형사 7명의 구둣발에 챘을때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경찰은 구둣발로 차고 깔아뭉개면서 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두 발을 로프로 묶었다. 김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으나 당하지 못했다. 김은 이때 총이나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혓바닥을 깨물려 했다. 경찰은 재빨리 포켓에서 형사수첩을 꺼내어 김의 입에 물렸다. 김의 입에선 피가 흘렀다.”(1968년 2월 25일 자 7면)

영화 '김의 전쟁' 포스터.

김희로 사건은 1991년 후지 TV 드라마 ‘김의 전쟁’, 1992년 유인촌 주연 영화 ‘김의 전쟁’이 제작되면서 다시 관심이 커졌다. 부산 자비사 박삼중 스님이 석방과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1999년 9월 7일 복역 31년 만에 석방됐다. 이때 한국으로 오면서 생부(生父)의 성을 따라 권희로로 개명했다.

귀국 후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귀국 직후 옥중 결혼을 했던 아내가 돈을 훔쳐 달아났다. 2000년 9월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체포됐다. 일본 언론은 권희로가 한국에서 살인 미수 혐의로 수감됐다는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2000년 9월 5일자 31면.

“권희로씨가 난동을 부린 사건에 대해 일본 언론들도 4일 주요 기사로 다루며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가석방된 권씨가 한국민들로부터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은 데 대해 “단순 흉악범에게 왜 그러느냐”는 분위기가 꽤 있었다. 마이니치신문은 4일 ‘김희로(일본에 있을 당시 이름) 전 복역수 체포’라는 제목으로, 아사히신문은 ‘김희로씨 방화 혐의’란 제목으로 권씨 사건을 사회면에 눈에 띄게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권씨가 사건 초기부터 석방 뒤까지 강연 등을 다니며 한국민에게는 영웅처럼 받아들여졌다’고 언급, 지금까지 한국민의 평가가 잘못됐음이 이번 사건으로 증명됐다는 듯한 인상의 기사를 실었다.”(2000년 9월 5일자 31면)

권희로는 2010년 3월 26일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서 전립선암 투병 중 별세했다.

“권씨는 열흘 전 자신의 석방 운동을 주도했던 삼중 스님에게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뿌려주고, 반은 시즈오카현 어머니 묘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2010년 3월 27일 자 A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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