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라이프

아이젠하워 방한은 2차례 아닌 3차례… 1946년에도 서울 왔었다

¬ìФ´ë지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1969년 3월 28일 79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1959년.

미국 장성(원수) 출신으로 제34대 대통령을 지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890~1969)는 한국을 두 차례 방문했다고 온라인 백과사전 등은 기록한다.

구글 인공지능(AI) 제미나이도 아이젠하워 방한은 두 차례라고 답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6·25전쟁 중인 1952년 12월 2~5일 방한했고, 현직 대통령으로 1960년 6월 19~20일 방한했다. ‘두 번이 방한 기록의 전부인가’라는 추가 질문에 제미나이는 “공식적인 기록상 아이젠하워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두 번이 전부”라고 확고하게 답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지면을 일별한 결과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찾은 기록은 한 번 더 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 육군참모총장이던 1946년 5월 15일 오후 0시(12시) 35분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일본에 맥아더 사령부가 주둔하고, 남한에 하지 중장의 미군정이 실시되던 때였다.

아이젠하워 원수, 15일 서울에 안착. 1946년 5월 16일자 1면.

“미국 육군참모총장 아이잰하워 원수는 지난 구일 남경으로부터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였든 바 여정을 변경하야 기간 동경 맥아더 사령부를 거처 십오일 오후 영시 삼십오분에 안착, 출영한 하지 중장 및 아놀드 소장, 리취 소장과 가치 경무대 하지 중장 관저로 드러갓다. 동 원수는 하지 중장 이하 각 군수뇌부가 군대에 관한 토의를 할 터인데 이경(離京) 시일은 미정이다.”(1946년 5월 16일 자 조간 1면)

아이젠하워는 이날 오후 3시 20분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오키나와로 향했다. 한국에 머문 시간은 약 2시간 45분이었다.

1946년 5월 17일자 1면.

“전후 태평양 방면의 미군 사정 시찰 도정에 십오일 오후 동경으로부터 내조(來朝)한 미 육군성 참모총장 아이잰하워 원수는 서울 경무대 하지 중장 숙사(宿舍)에서 하지 장군 이하 미군 주둔 관계 장성과 요담을 맛치고 동 오후 삼시 이십분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충승도(冲繩島·오키나와)로 향하였는데(….)”

아이젠하워는 한국을 떠나면서 서울방송국을 통해 한국민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이 라디오를 통하야 미국 육군성에서 가저온 몃마디 인사의 말슴을 드릴 기회를 엇게 되였읍니다. 귀국 방문 시간이 하도 촉박해서 여러분의 도시와 제읍(諸邑)을 구경하지 못하게 되였읍니다. 그러나 하지 중장과 그의 부하에 있는 미군 주둔군을 통하야 여러분이 이것만큼 아러 주시면 고맙겟읍니다. 전미국(全美國)은 여러분을 돕고 여러분의 희망하시는대로, 즐겨하시는대로 사시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행복된 번창한 국민이 다시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미국에서 오는 경하(敬賀)와 예사(禮辭)의 말슴을 끗침니다.”(1946년 5월 17일 조간 1면)

아이젠하워 당선. 1952년 11월 7일자 1면.

아이젠하워는 1951년 신설된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끝으로 1952년 5월 예편했다. 이해 11월 4일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 선거인단 442표 확보로 89표에 그친 민주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이기고 34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20년 민주당 정권을 끝낸 공화당 대통령이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한국전쟁 종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한 공약이 당선에 큰 도움이 됐다.

방한 공약 이후 신문 지면에 한국 방문을 환영한다는 기사가 여러 차례 실렸다. 아이젠하워가 당선 소감에서 “나는 한국을 확보하기 위해 싸우겠다”고 하면서 6·25전쟁 승리와 한반도 통일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아이젠하워의 대승에 만족을 표시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이 지지부진 상태에 있는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諸) 노력을 경주할 것을 희구(希求)하고 있다. 당지(當地)의 전반적인 표정을 보면 아이젠하워는 첫째로 한국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에 항거하여 싸울 만한 충분한 힘을 갖게 하기 위하여 남한 청년에 대한 군사훈련을 촉진시킬 것이요, 둘째로 한국전쟁을 성공에 종결케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1952년 11월 7일 자 조간 1면)

대통령 당선인 아이젠하워는 비밀리에 12월 2일부터 5일까지 한국을 찾았다. 12월 5일 자에 ‘환영 아이젠하워 원수’ 기사가 실렸지만 언제 방문했다는 내용 없이 아이젠하워에게 바라는 한국 국민의 염원을 적었다.

1952년 12월 5일자 1면.

“한국 국민의 금원(今願)은 ‘아’(*아이젠하워) 원수(元帥)의 명석하고도 현명한 판단에 크게 기대하여 첫째는 국토 통일을 위한 북진(北進), 둘째는 국군 증강을 위한 원조(援助), 셋째는 전재(戰災) 부흥을 위한 협조의 달성만이 한국 문제 해결의 첩경이며 또 대경임을 절규하고 있다.”(1952년 12월 5일 자 조간 1면)

아이젠하워가 방한했다는 기사는 그가 한국을 떠난 후 실렸다. 그만큼 보안에 철저했다는 뜻이다. 12월 7일 자 1면 기사 제목은 ‘아 원수, 2일 입경(入京) 5일 이한(離韓)’이었다.

1952년 12월 7일자 1면.

“아이젠하워 씨는 그야말로 놀랄 만큼 극비리에 내한하였다. 아이젠하워씨는 2일 하오 7시 57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는데 아이젠하워 씨 일행은 시민의 주목을 조금도 끌지 않은 자동차로 팔군사령부로 안내되었다. (중략) ‘아’씨가 도착한 비행장에는 팔군사령부로부터 안내와 출영을 겸 한 명의 대령밖에 나오지 않었던 것이라 한다.”(1952년 12월 7일자 조간 1면)

아이젠하워는 방한 기간 이승만 대통령과 3차례 회담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한 가운데 방한 중인 미 차기 대통령 아이젠하워 원수는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과 삼차에 걸쳐 중요 회담을 하였다. 일차 회담은 미 제팔군사령부에서 3일 하오 4시 40분부터 약 60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대통령은 백 육군총참모장을 대동하였을뿐 (….)”(1952년 12월 7일 자 1면)

기사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4일 오후 4시 10분부터 8군사령부에서 1시간 2차 회담, 5일 오후 6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에서 15분간 3차 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이 아이젠하워에게 요구한 사항은 곧 알려졌다.

1952년 12월 8일자 1면.

“1. 한국은 북한을 분할한 여하한 휴전도 수락할 수 없다. 만약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하여서라도 남북을 통일하여야 한다. 2. 여하한 정치적 해결안도 중공군의 철퇴(撤退) 및 북한 괴뢰정부의 해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3. 유엔은 북한의 총선거를 감시하여 한국의 북한 병합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한국은 미군의 철퇴(撤退)에 반대하며 공산 세력 침략을 격퇴하는 것을 계속 요청한다. 5. 한국군 독력(獨力)으로 반공전의 전선을 수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한국군은 증강되어 일층 장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적어도 한국군은 20개사(師)로 구성되어야 한다. 7. 장기적 대한 원조 계획을 진행하여 전투 종료 후 즉시 실시하여야 한다. 8.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태평양 방위 조직은 즉시 설치되어야 한다.”(1952년 12월 8일 자 1면)

이승만은 회담에서 현 상태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이라도 북진해 통일을 완수하겠다고 주장했고, 아이젠하워는 선거 공약인 ‘조기 종전’ 이행을 위해 타협적인 휴전을 종용했다. 이승만은 휴전이 불가피하다면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전후 복구 원조를 강력히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군 증강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상호방위조약엔 확답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후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는 초강수로 압박했다. 아이젠하워는 결국 극동의 최빈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1960년 6월 19일자 1면.

아이젠하워는 두 번째 임기 때인 1960년 6월 19일 다시 방한했다. 당시 한국은 이승만이 하야한 후 대통령 직은 공석이었고, 허정 과도정부 수반이 내각을 맡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그래도 예정했던 방한 일정을 취소하지 않았다. 미국을 떠나기 전 “대한민국은 그 정부 수립 이래 자유 세계의 최전선에 반공 보루를 유지함에 있어서 우리와 손을 맞잡고 일해 왔습니다. 이 보루는 대한민국의 안전 보장상 또한 미국의 영예상 필수적인 것”(1960년 6월 19일 자 석간 4면)이라고 밝혔다. 현직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처음이었다.

1969년 3월 29일자 2면.

당초 일본 방문도 예정되어 있었지만 취소했다.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 안전을 우려한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국도 4·19 직후 혼란으로 안전 우려가 제기됐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국민은 100만(경찰 추산)~200만(미국 측 추산)명이 연도에 나와 아이젠하워 방한을 열렬히 환영했다. 아이젠하워는 대규모 환영 인파를 보고 “나의 한국 방문은 오늘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1969년 3월 30일 자 조간 3면)고 흡족해했다.

¹ì‹ 2026´ëª…궁금˜ì‹ ê°€

지ê¸ë°”로 AI가 분석˜ëŠ” 가•교¬ì£¼ 리포¸ë 받아보세

´ëª… œë‚˜ë¦¬ì˜¤ •인˜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