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37년 3월 29일 29세
김유정.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은 1933년부터 평론가 안회남이 쓰는 ‘문예시평’과 ‘월 창작평’에 이름과 작품이 오르내렸다. 1933년 5월 단편 ‘산골 나그네’가 처음이다. 안회남은 다른 작가의 작품과 함께 ‘산골 나그네’를 극찬했다. “이제 처음으로 대하는 작가이나 결코 재래의 구식적 작가가 아니라는데서 크게 주목하는 바”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함부로 활자화한 수많은 수준 이하의 작품에 비하야 훨씬 우수한 것” “어지간한 수양과 실력을 가진 것을 증명하는 것”(1933년 5월 31일 자 석간 3면)이라고 주목했다.
9월 창작평에서는 잡지 ‘신여성’에 발표한 김유정 단편 ‘총각과 맹꽁이’를 “재미나게 읽었다”면서 “어떠한 실재에서 출발한 허구”로서 “묘사가 생생”(1933년 9월 27·28일 자 6면)하다고 언급했다.
1935년 1월 1일자 신춘문예 당선작.
김유정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소낙비’가 당선작으로 뽑히면서 본격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당선작 발표에 원제는 ‘따라지 목숨’이라고 적혀 있다. 신문사 쪽에서 제목을 바꾼 듯하다. 김유정의 약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강원도 춘천에 출생 조실부모로 경성 재동공보를 거쳐 휘문고보 졸업으로 연전(延專) 문과를 중도에 퇴학(退學), 보전(普專) 법과에 입학하야 다시 금광(金鑛)으로 배회 답사하다가 문필에 뜻을 두게 되여 현재 경성부 사직동 일이삼의 일번지에 우거(寓居)한다고.”(1935년 1월 4일 자 석간 9면)
김유정은 신춘문예 당선 후 활발하게 작품을 썼다.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만무방’(1935년 7월 17~31일)을 비롯해 ‘금 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 ‘따라지’ 등을 발표했다.
1936년 5월 6일자 5면.
호평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계열 평론가로 훗날 월북하는 엄흥섭은 ‘동백꽃’에 대해 “농촌에서 태어난 총각 처녀의 연정을 다만 흥미있게 가볍게 스켓취 해본 데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라며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심각한 인생의 체험이라거나 우울한 현대 조선 농촌의 면모를 찾아볼 수는 도저히 없다”(1936년 5월 6일 자 석간 5면)고 혹평했다.
1937년 1월 29일자 5면.
작품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춘문예 당선 후 2년여 지난 1937년 3월 29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두 달 전 병상에서 쓴 글 ‘병상 영춘기’를 조선일보에 마지막으로 연재(1937년 1월 29~31일)했다. 마지막 문단에 자신의 심각한 병세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저녁이 되어 오면 모든 병(病)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시간을 보지 안허도 신열(身熱)이 올라 오한으로 뼈끝이 쑤시어 올 때이면 그것은 틀림업는 저녁이다. 오한에는 도한(盜汗)이 딸흔다. 도한을 한번 쭈욱 흘리고 나면 몸은 풀이 죽는다. 삼복 더위에 녹아부튼 엿가락 갓기도 하고 양춘(陽春)에 풀리는 잔설(殘雪) 갓기도 하다.”(1937년 1월 31일 자 석간 5면)
김유정 별세. 1937년 3월 31일자 2면.
김기림·이상 등과 함께 문인 동호회 구인회에서 활동했다.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은 김유정이 죽고 19일 뒤인 1937년 4월 17일 도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