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연구가 고은정 ‘김치 책’ 출간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에 있는 고은정 음식 연구가의 연구실엔 장독이 가득하다. 그에게 김치란 ‘인생과 가장 닮은 음식’이다. /김영근 기자
산바람 불고 계곡물 흐르는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길. 각종 장과 소금이 그득한 장독 200여 개가 고은정 음식연구가의 연구실 ‘맛있는 부엌’을 감싸고 있다. 고은정은 셰프들의 선생님으로 불린다. ‘밍글스’ ‘정식당’ 등 국내외 유수 레스토랑 셰프뿐만 아니라 청와대 요리사들도 그의 김치와 장 수업을 들었다. 최근엔 한식 파인 다이닝 ‘권숙수’의 셰프들이 장 담그는 것을 도왔다. 그가 최근 계절별로 가장 맛있는 김치 45가지를 쉽고 자세하게 소개하는 신간 레시피북 ‘김치 책’(몽스북)을 냈다. 봄이지만 볼에 닿는 바람엔 찬 기운이 남아 있던 지난 25일 그를 만났다.
고은정은 김치가 가장 인간의 삶과 닮은 음식이라고 본다. 팔팔한 청년 같은 겉절이가 간이 흔들리는 시기를 지나 원숙하게 맛이 든 익은 김치에 이른다. “어떤 재료는 물김치가 좋고 어떤 재료는 푹 익어야 맛있죠. 우리 삶의 모습이 모두 다른 것처럼요.” 그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인사말이 “잘 익어가자”다.
그는 2000년대초부터 산의 약초와 제철 음식을 공부하며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지리산에서 제철 음식학교, 장학교, 김치학교 등을 열고 있다. 김치를 잘 담그던 어머니로부터 ‘김치 독립’을 하는 게 어릴적 목표였는데 여기까지 왔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고은정 김치를 받아가고 있더라”며 웃었다.
고은정 음식연구가의 봄동겉절이/박진성 기자
“맛있는 김치, 잘 지은 밥 두 개면 사실 다른 게 필요 없어요. 김치는 생각보다 쉬워요. 요즘 사람들 샐러드도 쉽게 만들잖아요?” 그가 봄동 겉절이를 내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해를 덜 받아 노랗고 풀내가 적은 봄동 잎에 고춧가루·액젓·마늘 같은 간단한 양념을 넣고 버무리니 끝났다. 액젓 대신 젓갈이나 간장을 써도 좋다. “간장은 ‘일 잘하는 참모’예요. 김치든 나물이든 원재료 맛을 끌어올리고 자기 색채는 부드럽게 숨겨요. 반대로 젓갈은 자기 주장이 강하죠.”
최근 '김치 책'을 출간한 고은정 음식연구가가 전북 남원 장독대에서 김치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김영근 기자
신간에 담긴 레시피도 상세한 계량과 간결한 요리법으로 따라 하기 쉽게 썼다. 제철의 신선한 재료일수록 더 단출하게 조리해야 맛있다는 철학을 담았다. 배추 김치를 바로 김치냉장고에 넣지 말고 80%가량 익힌 후에 넣으면 더 맛있게 숙성된다는 팁도 전했다.
오히려 까다롭지만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게 밥이다. “서양은 빵을 0.1g 단위로 계량하고 온습도까지 계산하는데 한국인의 근원이 담긴 주식(主食)은 그러지 않잖아요.” 국내 유통되는 쌀 품종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다. 여기에 냄비밥은 더 달고 부드럽고 압력밥솥 밥은 식감이 살아있다. 쌀과 취사 기구의 조합으로 낼 수 있는 맛의 종류만도 셀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밥 짓는 물 양도 기구의 모양·크기와 상관없이 ‘손등 높이’로 어림잡는다. “품종에 따라 찰기도 맛도 다 달라요. 내 입맛에 맞는 하나의 품종을 천천히 찾아보면 재밌습니다. 계량컵을 들고 냄비밥은 쌀과 물을 1대 1.2로, 압력밥솥은 1:1로 지어보세요.”
고은정 음식연구가가 차린 머위, 고들빼기 등 지리산 산나물./박진성 기자
고은정은 제철 음식의 가치를 강조한다. 기후·환경 같은 거창한 의제를 빼고도 싸고, 맛있고, 영양이 많다. 그가 말하는 제철 음식이란 ‘1년 기다려’ 먹는 음식이다. 한국 식재료는 절기마다 다채로워 지루할 틈도 없다. 그는 4월 중순쯤의 가죽순을 가장 좋아한다. 묽은 밀가루 반죽을 살짝 입혀 전을 구워내면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고.
문재인 정부 초기 그는 청와대 장독대를 복원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처음엔 그를 셰프로 영입하려 했으나 “역량이 부족하고 부담스러워 사양했다”고 한다. 고은정이 외부 강의를 갔을 때 찾아온 청와대 행정관이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 일도 있었다. 주방을 맡는 대신 장독을 복원하기로 하고 청와대에 갔을 때 “삼고초려에도 안 나타났던 선생님이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고은정은 대통령 관저 옆을 장독 묻을 장소로 정했는데, 당시 직원들은 “원래 거기가 장독 있던 곳인데 어떻게 아셨냐”며 신기해했다.
현대인들은 조미료 맛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게 그의 불만이다. 원재료의 맛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 신선한 제철 음식을 ‘직접’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봄 기운 완연한 계절엔 미나리와 연근을 권했다. 살짝 데친 후 간결하게 소금과 참기름에 무쳐 향과 질감을 느껴보라고 했다. “직접 해보는 게 중요해요. 더 맛있게 느껴지거든요.”
고은정 음식연구가의 신간 '김치 책'/몽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