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4년 4월 5일 84세
더글라스 맥아더.
1945~1951년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는 1945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에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1940년 8월 강제 폐간됐다가 해방 후 처음 발행한 복간(속간)호 신문이었다. 기사는 맥아더가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일본 황실의 재산을 동결했다는 내용이다.
“[동경이십일일발UP] 맥아더 대장은 일본 정부에 대하야 정규의 비출(費出) 외에는 황실 재산의 매매를 일체 정지하도록 명령하엿다. 따라서 총계 십오억원에 달하는 황실 재산은 동결되엿다.”(1945년 11월 23일 자 1면)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와 일왕 히로히토.
재일 조선인 단체는 일본을 통치하는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좌익 계열 조선인도 맥아더의 일본 통치를 함께 환영했다.
“구일 일본에 잇는 조선인 연맹의 약 오백명 군중은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함께 맥아더 사령부 아페 모혀 조선 해방에 대하야 감사의 뜻을 표하엿다. 이에 관하야 그 연맹에서는 조선의 완전 독립을 도아준 맥아더 사령관에게 대하야 감사를 드린다고 발표하엿다.”(1945년 12월 11일자 1면)
맥아더의 일본 점령 정책은 조선에서도 큰 관심이었다. 일본 신도(神道)에 재정 지원 금지(1945년 12월 17일 자 1면), 일본 국수주의 단체 해산(1946년 1월 6일 자 1면), 조선 쌀의 일본 유출 엄금(1946년 1월 31일 자 2면), 일본의 잔존 함선 파괴 명령(1946년 5월 13일 자 2면) 등 관련 기사가 이어졌다.
1948년 8월 15일자 1면. 금일 대한민국 정부 발족. 맥아더 원수도 참석.
맥아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 도쿄에서 부인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참석했다.
“세 돌 마즌 팔·일오 해방기념일, 통일은 못보았다 하드래도 정부수립을 세계에 선포하는 십오일 지리한 장마도 개여 맑은 하늘빛이 더욱 맑어보이는 첫새벽부터 가가호호에는 국기를 게양하고 깨끗이 청소한 시가에는 중앙청 광장을 중심 각 단체를 대표하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일우웟다. 이 도열한 군중의 틈을 헤치고 극동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그의 부인이 입장과 아울러 내외국의 고관 명사 다수 참석하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급 국민축하식이 열이여 별항 순서와 같이 꽃다발과 코라스 속에서 기념식이 성대히 거행되여 오후 일시 십오분 끝이 나자 뒤이여서 이날을 축하하는 만여 육해군의 장엄한 분열식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전개되었다.”(1948년 8월 16일자 2면)
맥아더와 이승만.
맥아더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서 옛 대한제국 황실 왕비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로부터 기념 선물을 받았다. “구 왕궁 윤비(尹妃·*순종 계비 순정효황후)로부터 청옥(靑玉) 화병이, 대통령으로부터 유서 깊은 질동제(質銅製) 향로, 국무총리로부터 순은제 신설로 한 틀이 ‘맥’ 장군 부처에게 선사”(1948년 8월 16일 자 2면)되었다.
맥아더는 정부 수립 한 달 보름쯤 후 이승만 대통령을 도쿄로 초청했다.
“지난 팔월 십오일 대한민국 독립 축하식전에 참가하였든 맥아더 원수의 초청을 받고 이 대통령이 이번에 동경으로 사(司) 원수를 방문하게 되었다. 즉 이 대통령 부처는 비서 수원(隨員) 각각 일명을 대동하고 내 십구일 맥 원수가 보내온 비행기로 서울을 출발 도일(渡日)하야 익 이십일 귀국하리라는 바 대통령의 이번 일본행은 별 정치적인 의도는 없고 맥 원수에 대한 단순한 회사(回謝)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1948년 10월 9일 자 1면)
1950년 11월 7일자 1면.
맥아더는 이승만으로부터 신생 대한민국이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한국민의 염원을 이야기했다.
“이 박사는 수립 후 이 개월의 불과한 그의 대한민국 정부가 당면한 문제에 관하여 여좌(如左)히 말하였다. 대한민국 및 그 국민의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는 소련이 조직한 북조선의 공산주의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련의 공산계열 음모이다. 북조선으로부터 공산당원은 속속 남한으로 잠입하여 다수의 소요를 이르키고 있다. 그런데 북조선에 공산 정부가 존속하는 한 여사(如斯)한 음모는 계속될 수박게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적색독재를 남한에까지 확장하기를 결의하고 있다. 한국민의 지대한 관심은 국가 통일이며 이전의 국경을 회복하고 남북이 동일 정부 하에 단일체로서 통치되는 것이다.”(1948년 10월 16일 자 1면)
이때 만남은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맥아더가 공산주의 침략군 격퇴를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북한 지원을 위해 한반도로 침입하자 “사상 초유의 국제법 침범”(1950년 11월 7일 자 1면)이라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1951년 5월 6일자 1면. '만주 폭격만이 첩경'.
맥아더는 미 상원 군사외교합동위원회에 출석해 한국전쟁을 종전하기 위해 만주 폭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전쟁을 조급히 마치려면 공산군의 보급선을 끊으면서 만주에 대한 군사기지를 폭격하고 대중공 경감수출을 중지하여 공산군으로 하여금 전투력이 약화되게 방해하여야 된다. 일방 국제연합이 이러한 정책을 쓰면 현재 한국에 있는 지상군을 증가시키지 않더라도 전쟁은 급속히 해결될 것이다.”(1951년 5월 6일 자 1면)
트루먼 정부는 맥아더의 전쟁 전략을 수용하지 않았다. 앞서 맥아더는 1951년 4월 11일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됐다. 이후 리지웨이와 클라크 장군이 사령관직을 이어받아 전쟁을 수행했다.
1964년 4월 7일자 3면.
맥아더는 1964년 3월 황달 증세로 입원 후 담낭 제거 수술 등 2차에 걸쳐 복부 수술을 받았다. 폐렴 증세와 신장 기능이 악화하면서 4월 5일 사망했다.
부음 특집 기사에는 맥아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한반도 분단은 반드시 끝나야 한다고 행한 연설 내용이 실렸다.
“정의의 위력이 용진(勇進)하는 이 찰나(刹那)에 역사적 일대 비극이 있읍니다. 귀국 강토는 인위적인 장벽과 분할로 무색해졌읍니다. 이 장벽은 반드시 파멸해야 할 것이며 또한 파열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국민으로 통일하는 것을 막을 것이란 천하에 아무 것도 없읍니다. 한국 국민은 너무나 위대한 선조의 후손이라 외래의 분열의 철학에 굴(屈)하여 그들의 성업(聖業)을 희생시킬 리가 없읍니다.”(1964년 4월 7일 자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