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파트는 정치 좌우하고 저출산 원인 돼 미래까지 위협
20세기 많은 전쟁은 석유가 기획… 21세기의 재앙은 온실가스
그래픽=이철원
괜히 혼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이 있다. 극단적인 사회 갈등의 양상만 놓고 보면, 한국도 미국 못지않다. 보수와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계층, 성별, 지역, 세대 갈등까지 더해져 사실상 정신적 내전 상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 불타오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국에서 이러한 적개심이 물리적 폭력으로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
그 이유를 딱 하나만 찾자면 ‘총’이다. 강력한 총기 규제 덕분에 극단적 갈등이 끔찍한 폭력으로 전환하는 일이 드물다. 가까운 현대사를 살펴보면, 그 증거도 있다. 지금보다 훨씬 총을 구하기 쉬웠던 1940년대 중후반 해방 공간에서는 총기 테러가 많았다. 김구(1949년)도 여운형(1947년)도 송진우(1945년)도 큰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야 했다.
총처럼 세상에 들어와서 인간과 얽히며 핵심 역할을 맡는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ctor)’가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의 주도적 역할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애초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같은 지식인이 과학 연구가 이뤄지는 실험실에서 각종 측정 장비와 시약 같은 비인간 행위자가 과학 지식 자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면서 주목받은 이 접근법은, 최근 들어 인간사 전반에 영향을 주는 온갖 비인간 행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인간 행위자는 바이러스나 세균 같은 병원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신종 변이 바이러스가 2020년부터 수년간 한국 사회를 포함한 전 세계에 준 충격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과거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을 일으킨 병원체는 단적인 사례다. 당시 유럽 인구의 최대 절반 이상이 희생되었다는 추정치가 있을 정도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2025년 5월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한 결혼정보회의 소개팅 현장.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뒤에 아파트가 보인다. /박성원 기자
수많은 비인간 행위자 가운데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만 꼽자면 한국의 ‘아파트’와 세계의 ‘화석연료’가 있다. 산업화 시대 팽창하는 서울의 주거난을 해결하려는 손쉬운 수단으로 선택된 아파트는 어느새 라이프스타일은 물론이고 자산 구조와 정체성, 심지어 정치까지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행위자가 되었다.
자기 명의의 번듯한 브랜드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되는 한국 사회의 자산 구조는 결혼과 출산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높였다.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생이다. 아파트가 한국의 인구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둘러싼 사정은 어떤가. 당장 미국과 이란의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전쟁터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삶의 불안정성이 커졌다. 미국의 폭격으로 이란에서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의 ‘사람’보다도 호르무즈 해협에 막힌 ‘석유’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상황은, 이 비인간 행위자의 압도적 위상을 보여준다.
광주 북구 에너지정책팀 직원들이 구청 구차장에서 직원들 차량을 대상으로 5부제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물을 차량에 부착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상황은 더욱더 복잡하다. 만약 이란을 포함한 서남아시아 나라들에 석유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강대국의 개입도 훨씬 덜했을 테고, 그 반발로 득세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입지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전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 미사일이 오가는 상시적 전쟁 상태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석유가 그 지역의 정치를 설계한 셈이다.
화석연료가 대기 중에 풀어 놓은 또 다른 비인간 행위자 ‘온실 기체’도 문제다. 19세기 중반부터 화석연료를 태우면서 나오기 시작한 이산화탄소는 20세기 내내 지구를 데우더니, 이번 세기부터 그 양상이 심상치 않다. 특히 2020년대 들어서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가 오르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2018년 인천 송도에서 세계 기후 전문가들이 산업화 이전(19세기 중반 이전)과 비교한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도’로 제한하자고 합의했지만, 현재 과학계는 이 목표 달성이 어려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2030년대에 1.5도 이상 상승할 게 거의 확실하다. 그 이후에 지구 기후와 그것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생태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한 가지 확실한 전망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 폭염과 한파, 가뭄과 폭우가 심화하는 더 극단적인 기후 패턴이 나타나는 일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그렇게 살기가 각박해지면 갈등이 심해지고 결국 또 전쟁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의 많은 전쟁이 사실은 석유가 기획했고, 21세기의 재앙은 이산화탄소가 준비하고 있다. 비인간 행위자는 악의가 없다. 그러나 결과는 끔찍하다.
☞ 비인간 행위자
: 인간은 아니나 사회에 개입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주체. 동식물, 바이러스, 사물, 물질이 여기에 해당하며, 인간의 의도를 변형하고 세상을 재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