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마이너노트로
우에노 지즈코 지음|은혜 옮김|후마니타스|310쪽|1만9800원
왈츠처럼 명랑하고 화려해 보이는 삶에도 단조(短調·마이너 노트)의 선율이 느릿하게 깃들 때가 있다. 노년은 누구에게나 쇠락을 예감하는 애상적인 곡조로 다가온다. 일본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78) 도쿄대 명예교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트레이드 마크. 여성학계에 일대 파장을 일으킨 대표작 ‘여성혐오를 혐오한다’(2010),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2021) 등 도발적인 저서를 평생 내놓은 그다.
그러나 2024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 에세이집은 여태껏 그가 보여준 활기와는 다른 음조로 펼쳐진다. “나는 올해 후기 고령자가 된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이다”라는 나직한 읊조림이 주제의식을 관통한다. 일본에서는 65세부터를 ‘전기 고령자’, 75세 이상을 ‘후기 고령자’로 본다. 우에노는 1948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1차 베이비붐 세대, 즉 ‘단카이(団塊) 세대’(1947~1949년생)다. 일본에선 1960~1970년대 학생운동과 1970~1980년대 고도성장을 주도한 단카이 세대 전체가 75세 이상이 되어 나타나는 고령화 사회의 여러 문제를 ‘2025년 문제’라 부르기도 한다.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우에노는 명철하고 자의식 강한, 평생 독립적인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했던 지식인마저도 노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약자가 되고 마는 서글픈 생의 섭리를 직시하며 독자들이 ‘늙음’과 ‘죽음’을 고찰하도록 이끈다. 일본에선 ‘인지증’이라 부르는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은 부분이 특히 그렇다. 고령자 시설에서 인지증으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이들 중에 군대에서 불합리한 폭력을 당하거나 행사한 경험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에노는 생각한다. “머지않아 내게도 인지증이 찾아오면 기억의 빗장이 풀리며 무엇이 비어져 나올까? 악몽에 시달리는 노후는 사양하고 싶다.”
요양 보호 대상 판정을 받고 주간 돌봄 센터를 다니고 있는 저널리스트 출신 저술가 헨미 요(82)의 에세이 ‘수박 비치볼’이 우에노에게 충격을 준다. 헨미 요는 노인 여럿을 앉혀 놓고 수박 모양 비치볼을 돌리며 공을 받은 사람이 요양 보호사가 제시하는 단어에 반대말을 제시하는 게임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다. 마침내 자신의 차례가 와서 보호사가 “‘밝다’의 반대는 뭘까~요?”라고 아이 다루듯 물을 때 거센 분노를 느끼며 자문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노여워하는 걸까?… 여기서 ‘저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심신의 노화. 그것에 초조해하는 나 자신. 그리고 속절없이 쇠약해져 가는 상황을 아직 체념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조바심이 나서, ‘저런 사람들’과 나를 필사적으로 구분하려 했고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구분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눈물이 고인다. 풍경이 흐릿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우에노는 말한다. “’자, 여러분, 함께해요’라고 말하는 주간 돌봄 센터의 레크리에이션 같은 데 나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단체 행동을 좋아한 적 없는 내가 늙었다고 그런 걸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 (…)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식사도 목욕도 내 몸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노년의 현실이다.”
죽을 때 후회로 남기고 싶지 않은 일 중 최우선은 결국 ‘용서’와 ‘화해’다. 우에노는 그중 특히 ‘부모와의 화해’를 꼽는다. 그는 성장 과정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고 자란 가정에서 일본의 가부장제를 배웠습니다’라며 독불장군 아버지를 힐난했다. 그러나 오빠와 남동생에겐 의업(醫業)을 물려받으라 강요하면서도 자신에겐 아무 기대 없어 보였던 아버지가 어쩌면 시대가 억압한 당신의 자유로움을 딸에게만은 허락해 준 것이 아닐까, 뒤늦게 생각한다. 70대에도 최신 의학책을 사들였던 아버지의 모습에 연구자로서의 자신을 겹쳐 본다. “그렇게 거스르며 맞섰건만 결국 ‘아버지의 딸’이었던 걸까.”
마지막 챕터 ‘녹턴’에선 만년을 함께한 스물세 살 연상의 민중사학자 이로카와 다이키치를 비롯해 먼저 세상을 뜬 지인들을 위한 추도사가 만가(輓歌)처럼 울려 퍼진다. 격조 있고 우아하게 삶의 마지막 단계를 숙고하는 책. “늙음 앞에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의치 않은 신체라는 타자를 껴안은 채, 우리는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