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린 대구 출신 나윤출은 당시 조선일보 등에 이름과 사진이 수없이 실린 전국구 스타였습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33세 나윤출은 대구 인민위원회 보안대장으로 변신합니다. 인민위원회는 조선공산당(1946.11.23 3당 합당으로 남로당으로 개칭)이 미군정에 맞서 만든 지방 행정기구로, ‘대구 인민위원회 보안대장’은 ‘좌익들의 대구경찰서장’ 격이었습니다. 1946년 대구 10월사건이 발발하자 나윤출은 행동대원들을 100명씩 조를 짜서 시내에 풀었습니다. 이들은 대구,경북을 휩쓸며 경찰관과 우익 주민 학살에 앞장섰습니다. 사건 진압 후 38선을 넘으려다 체포된 나윤출은 “내 손으로 죽인 경찰관이 30명은 될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습니다.(1946.11.1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서울로 압송된 나윤출은 무슨 수를 썼는지 월북에 성공합니다. 해방정국의 난맥상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체육계 고위인사로 행세하다 1966년 영국 월드컵에 임원으로 참가하기까지 했고, 그 직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나윤출에 대해 대구시가 만든 <대구역사문화대전>에는 이런 어이없는 기록이 기술돼 있습니다.
“광복 이후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10월항쟁이 일어나자 나윤출은 ‘나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나윤출의 직책은 대구인민위원회 보안대장이었다.(중략) 미군정이 10월항쟁에 참여한 가담자들을 체포하고 처형시키자 나윤출은 1946년 10월 29일 38선을 넘다가 경기도 포천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46년 10월 30일 제1관구 경무총감부로 압송된 뒤 월북하였다. 나윤출은 <조선의 씨름>을 발간하여 북한 씨름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북한 체육계의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이 기록대로 대구10월사건은 ‘10월 항쟁’일까요. “경찰관 30명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대구10월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요.
1946년 남한의 상황은 시한폭탄 같았습니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로 쌀값이 최고 60배 폭등했고, 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대구,경북에는 콜레라까지 창궐해 사망자가 속출했습니다. 해방으로 고조됐던 기대감은 분노로 바뀌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습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한 박헌영에게는 호기였습니다. 박헌영은 체포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미군정에 대한 위력 과시가 필요했습니다. 최종 지령은 소련에서 받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북한 통치자인 소련 중장 스티코프는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946년 9월 9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9월 11일과 16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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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10월로 계획한 총파업이 한 달 앞당겨진 것은 스티코프의 지령 때문이었습니다. 9월 23일 조선공산당(조공) 산하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총동원돼 무려 25만 명이 가담한 전국적 파업이 시작됐습니다. 유일한 전국 운송수단인 철도까지 멈춰 세운 파업의 위력은 파괴적이었습니다. 9월 28일 스티코프는 비망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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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넨코(북한 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가 남조선 파업투쟁이 확산돼 학생들까지 합류했다며 500만 엔의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200만 엔을 지급했다. 임금 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 석방, 좌익신문 복간,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 철회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스티코프는 이런 내용을 소련 통치자 스탈린에게 암호 전문으로 보고합니다.
파업의 물결은 대구도 휩쓸었습니다. 9월 중순 조공 대구시당 위원장 손기영, 전평 경북도위원장 윤장혁 등이 ‘남조선노동자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24일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철도, 우편, 공장, 신문까지 모두 멈춰섰습니다. 전 산업이 파업한 것은 전국에서 대구가 유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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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파업 시발점인 대구역과 가까운 금정로(현 태평로)에서 전평 주도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곳에는 전평 대구 지부 격인 노평(조선노동조합대구지역평의회) 투쟁본부가 2층 건물인 운수노조 사무실 2층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만 5천 명의 군중이 ‘쌀 배급제 폐지’, ‘박헌영 선생 체포령 취소’를 외치며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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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노평 투쟁본부에서 “경찰 저놈들 죽여라” 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자 시위대는 경계 임무를 하던 150여 명의 경찰관들을 포위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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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맞은 경찰관들이 투쟁본부 건물을 향해 발포했고, 현장은 아비규환이 됐습니다. 대팔연탄공장 직원 황말용(혹은 황팔용)이 사망했습니다.(시위 주동자인 이일제 전평 경북위원회 간사 진술)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대구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일 오전 9시, 흰 가운에 마스크를 쓴 대구의대(현 경북대 의대) 학생회장 최무학 등 의대생들이 시트를 덮은 시체를 메고 나와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노동자의 시체’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신은 해부용으로 도립병원에 안치돼 있던 콜레라 환자의 시체였습니다. 방부제에 젖어 변색된 시체를 최근 숨진 것처럼 속이려고 최무학이 밤새 수돗물로 씻어냈다고 합니다. 최무학의 대구의대 동기인 김집(의사 출신 정치인, 체육부 장관 역임)은 1960년대 초 미국 유학 중 이런 내용의 미군정 재판 기록을 발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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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대생 150명은 시체를 앞세우고 대구사대를 거쳐 대구경찰서까지 행진했습니다. 시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대구의대, 사대, 농대, 중학생(당시 중학교는 6년제), 수많은 시민이 합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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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0분 대구경찰서는 노조, 농조(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부녀동맹,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공산당 전위조직) 등 수만 명의 군중에 포위됐습니다. 권영석 경북경찰청장이 ‘요구조건을 검토할 테니 평화적으로 해산하라’고 호소했지만 묵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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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대구 미군정청 경찰부장 존 플레지어(John C. Plezia) 소령이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강제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성옥은 ‘학도들에게 어떻게 총을 쏘느냐. 그리고 수십 명 병력으로 수만 명을 어떻게 물리치느냐’며 항명했습니다. 이성옥은 대구 유지들이 친일 경찰이라며 서장 임명을 반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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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플레지어 소령은 대구 주둔 미군 제1보병연대장 러셀 포츠(Russell J. Potts) 대령에게 군 동원을 요청했지만, 계엄령이 안 내려졌다며 거부당했습니다. 미군정 경북지사 고든 헤론(Gordon J. F. Heron) 대령의 요청으로 미군이 출동한 것은 대구경찰서가 시위대에 점령된 뒤였습니다. (필요할 경우 계엄령 없이도 군이 지원하게 돼있는 규정을 위반한 포츠 대령과 상황을 헤론 지사에게 즉시 보고하지 않은 플레지어 소령은 이후 징계 처분(<미 군정기 주한미군사>). 이성옥 대구서장은 파면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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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학생 대표의 담판이 진행되던 중 돌연 신재석 경위가 경찰 제복 상의와 모자를 벗어던지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했습니다.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열광했습니다. 기세가 오르자 조공 경북도당 책임자 장적우는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하면 군중을 책임지고 해산시키겠다’고 제의합니다. 오전 11시 30분 이성옥 대구서장이 이에 응해 경찰관들에게 총을 무기고에 넣고 특경대도 무장해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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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주동자 몇몇이 ‘경찰이 백기를 들었다. 안심하고 해산하라’고 외쳤지만, 시체를 보고 격앙됐던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은 ‘무장이 해제됐는지 확인하자’ ‘정치범들을 풀어주자’며 낮 12시 경찰서 안으로 난입했습니다. 경찰관들은 제복을 벗어던지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시위대는 100여 명의 수감자들을 풀어주고, 무기고에서 꺼낸 소총과 대검으로 무장해 시내로 몰려 나갔습니다. 트럭을 타고 적기가를 부르며 시내 곳곳으로 몰려간 시위대는 경찰관, 우익 인사들을 찾아내 닥치는 대로 학살했습니다.(동아일보 1946.10.15일자) 숨진 경찰관의 시신을 파출소 앞에 걸어두고, 상황판에 못을 박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잡범들은 상점과 주점을 약탈했습니다. 대구는 무법천지가 됐습니다. (송효순 <붉은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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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참전했고 준장으로 예편한 송효순 장군은 전쟁 전후 좌익의 학살극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사명감으로 20여년에 걸쳐 증인들을 만나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1979년 갑자문화사가 출간한 그의 취재기록 <붉은 대학살>에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참상들이 담겨 있습니다.
좌익 세력은 북성로 2가 우석환 경위의 집에서 부인과 두 딸을 몽둥이로 때려 즉사시킨 뒤 시신을 대구경찰서로 가져갔습니다. 삼덕동 민 모 순경의 집에서는 트럭으로 집을 들이받은 뒤 끌려나온 부인의 배를 찌르고 쇠파이프로 세 자녀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습니다. 60대인 어머니는 몽둥이로 때려 살해한 후 시신을 짓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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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천변에서 큰 방직공장을 하던 명륜동 서 모씨의 집에서는 안방에 불을 놓은 뒤 운전사 집에 숨어있던 가족 7명을 찾아내 죽였습니다. 서 씨의 부인과 큰 딸의 시신은 구식 일제 토요타 승용차의 뒷범퍼에 새끼줄로 매달아 대구 시내를 한 시간 반가량 끌고 다녔습니다. 봉덕동에서는 출근길에 붙잡힌 임모 경사를 부인과 5살짜리 아들과 함께 집에 집어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임경사가 아들을 안고 집 밖으로 나오자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찔렀습니다. 옆집 사람들은 반동을 편들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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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교외 고모(顧母)에서 사과 농장을 하며 지역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던 유지 61살 배홍수씨는 ‘농민을 착취해 재산을 모았다’며 낫으로 배씨의 얼굴을 치고 가족 11명을 모두 처참하게 살해했습니다. 닭을 잡아 배불리 먹고, 돼지기름을 낫,도끼,곡괭이에 발랐다고 합니다. 시위대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큰 돌을 달아 물에 던져 수장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옷을 벗겨 사지를 찢거나 잘라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이를 총검과 죽창으로 찌르기도 했습니다. 시신의 얼굴에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신원을 알아볼 수 없게 하기도 했습니다.
달성경찰서는 대구시의 변두리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한 달 전 신설된 곳이었습니다. 대구사대 길 건너여서 10월 2일 대구의대,사대,농대 등 3개 대학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가 코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미군 순찰대가 나중에 달성공원에서 경찰관 시신 7구를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두 명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사지가 제대로 붙어있지 않고 거세를 당한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경찰관의 얼굴과 몸을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10월사건을 취재한 정영진 저 <폭풍의 10월>(1976,한길사))
이것이 그들이 ‘10월 항쟁’이라 주장하는 대구10월사건의 기록입니다. 일부 경찰관들이 과거 친일 행각과 1946년 미곡수집령으로 인한 곡물 공출 과정에서 비난받을 일을 했다 해도 이런 학살을 두고 ‘민주항쟁’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민간인인 우익 주민들과 경찰관 가족들을 학살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자발적 항쟁이라는 주장과 달리 당시 미군정은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주하고 지시한 것이며,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계획은 면밀히 준비됐고 오직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근본 목적은 군정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에서 직접 조성한 것이다. 실제로 일 년 후 쯤 공산당 문건을 압수했는데, 이 문건에는 자신들이 잘못이나 약점, 그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향후 계획이 들어 있었다.” (1946년 9월,12월 주한미군 G-2 정보보고 및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 대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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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극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0월 2일 오후 6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돼 미군 장갑차까지 출동한 뒤 대구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만, 좌익 세력은 이미 경북의 22개 군청 소재지로 진격한 뒤였습니다. 또, 대구의사회는 부상당한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