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보국’展서 국보 등 46점 공개
일제 때 해외 유출 통로 된 경매서
일본인과 경합해 되찾은 작품들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8세기, 높이 42.3㎝. /간송미술문화재단
1936년 11월 서울 퇴계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 우윳빛 조선 백자 한 점이 탁자에 올랐다. 목이 길고 보름달 같은 몸체에 난초와 국화, 나비를 세 가지 색으로 돋을새김한 명품. 훗날 국보로 지정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다. 시작가 500원. 여기저기서 호가를 부르더니 순식간에 5000원을 넘었다.
“9000원!” 일본인 남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1만원!” 또 다른 남자가 받아친다. 경매는 둘의 숨 막히는 경합으로 이어졌다. 최종 낙찰가 1만4580원. 여기서 포기한 일본인은 세계적 골동품 회사였던 일본 야마나카(山中)상회의 주인 야마나카였다. 그보다 30원을 더 불러 백자를 손에 쥔 조선 남자는 간송 전형필(1906~1962). 번듯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하던 때였으니, 백자 한 점을 기와집 15채와 맞바꾼 셈이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특별전에 전시된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연합뉴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새 전시에 이 작품이 나왔다. 15일 개막하는 특별전 ‘문화보국(文化保國): 신념으로 지켜낸 우리의 얼’은 일제강점기 경성 고미술 경매장 한복판에서 간송이 되찾아온 서화와 도자를 한자리에 모았다. 국보 1건, 보물 1건 등 총 46점의 유물을 통해 치열했던 수집의 궤적을 조명한다.
1922년 일본인 골동상들이 세운 경성미술구락부는 조선 최대 미술품 거래 기관이었으나, 실상은 우리 유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주요 통로였다. 해방 전까지 260여 회 경매가 열렸고, 낙찰된 작품 상당수는 우리 땅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조선 말기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의 ‘팔준도’가 전시된 모습. 한 폭에 2마리씩, 8마리의 말을 네 폭에 나누어 그린 ‘팔준도’ 중 1폭과 4폭이 나왔다. /연합뉴스
김영욱 간송미술관 전시교육팀장은 “1920~1940년대 언론 아카이브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도록을 중심으로 확인한 결과, 간송은 총 32회 경매에 참여해 350여 건의 유물을 낙찰받았다”며 “그중 극적으로 경합한 유물 46점을 전시에 선보인다”고 했다.
하이라이트는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고미술 수집가 이영섭은 훗날 이날의 경합을 두고 “검과 검이 부딪쳐 불을 뿜는 듯했다”며 “현해탄을 건너려던 조선 백자를 그 일보 직전에서 수호했다”고 회고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제자 윤정현에게 써준 보물 ‘침계(梣溪)’가 전시된 모습. /연합뉴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제자 윤정현에게 써준 보물 ‘침계(梣溪)’, 조선 말기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의 호방한 말 그림 ‘팔준도’도 눈에 띈다. 6·25 전쟁 중 간송미술관 창고에서 유실됐다가 전후(戰後) 간송이 대한고미술협회 경매에서 다시 사들인 서화 3점도 볼 수 있다. 조선 말기 화가 우창 이용림의 ‘서당아집도’, 19세기 후반 미국에 부임한 중국 참찬관 팽광예와 조선 주미 공사관원 강진희가 함께 그린 ‘미사묵연’ 화첩이 이렇게 재입수된 작품이다.
보화각 앞을 지키게 될 석호상(호랑이 석상). 19세기 말~20세기 초, 높이 각 115.0㎝.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이 1935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입수한 ‘석호상’ 한 쌍도 공개됐다. 그동안 보화각 앞을 지켰던 청나라대 석사자상 한 쌍이 올해 안에 중국으로 떠나면, 둥글둥글한 우리 호랑이가 그 빈자리를 채울 예정이다. 간송미술관은 지난 1월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석사자상을 중국에 기증하기로 한 바 있다. 전인건 관장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호랑이 ‘더피’를 닮은 친근한 돌호랑이”라며 “앞으로 보화각을 지킬 수문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성인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