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기’ 안 눌러도 AI가 척척
그래픽=백형선
#1. “와… 자동 번역 생기니까 문화의 벽이 허물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다가 일어나 거실 나가니까 이탈리아 아저씨랑 인도네시아 아줌마가 우리 집 냉장고 뒤지고 있는 느낌임. 누구세요?”(한국어 X 이용자)
“김치 먹으러 왔어”(러시아어 이용자)
#2. “세계 곳곳의 모두가 함께 파스타를 마법처럼 개조해서 이탈리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어보자”(일본어 이용자)
“자동 번역으로 알게 된 세계의 공통점. 파스타를 마음대로 먹으며 이탈리아 사람을 놀리고 싶다”(한국어 이용자)
“우리 이탈리아인들이 뭘 잘못했어? ㅠㅠ”(이탈리아어 이용자)
전 지구적 단위의 ‘밈(meme·인터넷 유행)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 7일부터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의 모든 게시물이 실시간 자동 번역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온라인 풍경들. 과거에는 이용자가 직접 ‘번역하기’ 버튼을 눌러야 구글 번역기를 통해 번역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번 업데이트에선 별도 요청 없이 모든 외국어 게시물을 이용자가 사용하는 언어로 볼 수 있게 했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기업 xAI의 생성형 인공지능(AI) 챗봇 그록(Grok)을 활용한 자동 번역이다.
미세한 차이 같지만 반응이 뜨겁다. 번역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외국어를 자국어로 볼 수 있게 되자 “언어 장벽이 허물어진 것 같다”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1월 기준 X의 모바일 앱 일일 활성 사용자 수(DAU)는 약 1억2500만명. 아직 공식 통계는 없지만, 이들이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교류하기 시작하자 “체감상 게시물의 확산 속도와 범위가 넓어진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 11일 한 한국어 X 이용자가 올린 ‘이탈리아 아저씨랑 인도네시아 아줌마가 우리 집 냉장고 뒤지고 있는 느낌…’ 게시물은 조회 수가 990만회에 달한다. 평소 X에서 다이어트 식단과 운동법을 즐겨 보는 직장인 김모(29)씨는 “세계 각국의 다이어트 팁이 타임라인에 한국어로 떠서 놀랐다”고 했다.
언어 장벽이 사라지자 X 이용자들은 ‘사람 사는 세상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새삼스러운 진리를 마주하고 있다. “지구촌 한 가좍(가족)이야”(한국어 이용자) “우리가 모두 똑같은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고, 똑같은 것들을 트윗한다는 걸 발견”(포르투갈어 이용자) 등 세계인으로서 공통 감각을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반응이 많았다. “자동 번역아 우리 강아지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줘”처럼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강아지 사진을 찍어 올리며 자랑하는 팔불출 반려인도 만국 공통이다. 세계 각국 여자들이 입을 모아 “우리나라 남자 만나지 마세요”를 외치는 현상도 보였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번역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세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언어 차이로 인한 거리감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도 자동 번역을 도입하는 등 온라인에서는 이런 거리감이 아예 지워지고 있다. 일부 이용자들 사이에선 이번 X의 업데이트를 두고 “일론 머스크가 바벨탑을 재건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인류가 신의 권위에 도전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하자 신이 인간의 언어를 분화시켜 흩어놓았다는 구약성경 속 이야기에 빗댄 것이다. 자동 번역 덕에 각기 다른 언어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는 반응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술 발달에 따른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고 있었다. 오세욱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당장은 텍스트의 언어적 차이가 허물어지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음성 언어나 각종 동영상 콘텐츠가 바로바로 번역돼 외국인과 실시간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했다.
다만 X가 제공하는 번역을 얼마만큼 믿고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X의 자동 번역은 아주 작은 변화 같지만 전 세계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라며 “그록이 번역의 뉘앙스를 지배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오세욱 교수는 “그록은 코딩은 잘하지만 언어 능력은 다른 AI 툴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며 “세계 각국 이용자들의 대화를 학습해 쓰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바벨탑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내용. 하나의 언어를 쓰던 인류가 도시를 세우고,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다.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노한 신은 온 세상 말을 뒤섞어버린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공사는 중단되고, 이곳은 ‘바벨’(히브리어로 ‘혼돈’)로 불린다. X에서 모든 언어가 자동 번역되어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지자 ‘바벨탑 재건’이란 말이 나온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