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암종·34개 적응증에 쓰여
그래픽=백형선
퇴직을 앞둔 62세 남성 김모 씨는 1년 전만 해도 회사 열심히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어느 날 기침이 오래가 병원을 찾았고, 검사 결과는 비(非)소세포 폐암 4기로 나왔다. 한순간 말기 암 환자가 됐다. 폐암은 이미 뼈로 전이된 상태였다. “항암치료는 해보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는 말을 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종양내과 교수는 면역항암제라는 희망을 꺼냈다. 투여 몇 달 뒤 CT에서 폐암은 눈에 띄게 줄었다. 6개월이 지나자 일상생활을 평소처럼 할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이 환자 이야기는 더 이상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2018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면역항암제 덕분이다. 국내에 면역항암제가 도입된 지 10년 만에 18암종과 34개 적응증에 쓰이며 항암치료를 석권하고 있다. 거의 모든 암에 면역항암제가 단독 또는 병용 조합으로 쓰이면서 치료 성과를 낸다. 바야흐로 면역항암제 전성시대다.
면역항암제는 암세포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 대신 면역세포, 특히 T세포가 암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격하도록 ‘족쇄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암세포는 교묘하게 면역세포를 회피한다. 대표적인 방식이 PD-1/PD-L1 경로다. 암세포가 PD-L1이라는 신호를 내면, 면역세포는 “이건 공격하지 말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면역항암제는 이 신호를 차단해 면역세포에 암 공격 본성을 되찾아 주어 암세포를 잡아먹는다.
이 원리가 암 치료 패러다임을 바꿨다. 대표적인 것이 폐암이다. PD-L1 발현이 높은 비소세포폐암 환자에서는 면역항암제 단독 투여만으로도 생존기간이 기존 항암제보다 길어졌다. 일부 환자는 장기간 병이 진행되지 않는 ‘기능적 완치’ 상태에 가까운 결과를 보인다.
이세훈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면역항암제 덕에 생존율 제로 폐암 말기에서도 5~10%는 완치 가능성이 생겼다”며 “폐암 수술 전에 먼저 면역항암제를 투여 하여 암을 확 줄여놓고 수술하는 방식으로 조기 폐암 완치율도 상승됐다”고 말했다.
흑색종, 일부 대장암과 자궁내막암 등에도 면역항암제 단독으로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고 있다.
요즘은 면역항암제와 다른 항암제를 섞어 쓰는 병용요법이 암치료 대세로 자리 잡았다. 신장암에서는 면역항암제 두 가지를 함께 쓰거나, 면역항암제와 표적치료제를 병용하는 방식이 표준이 됐다. 위암과 식도암에서는 기존 항암제 화학요법 위에 면역항암제를 얹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방광암에서는 면역항암제와 항체-약물 결합체를 병용해 기존 치료가 어려웠던 환자군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유방암 중에서도 가장 치료가 어려운 삼중음성유방암에서 면역항암제는 화학요법과 병용할 때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면역항암제 병용 투여가 왜 효과적인가. 기존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를 일부 파괴하면서 ‘면역을 자극하는 신호’를 만든다. 이때 면역항암제를 함께 쓰면 면역반응이 증폭된다. 암은 주변에 항암제가 공격하지 못 하도록 방어막을 치는데, 병용요법은 이를 무너뜨리는 데 효과를 높인다.
면역항암제에도 한계가 있다. 같은 암이라도 누군가는 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누군가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면역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폐, 간, 장, 피부 등에 염증이 생길 수 있다. 고가의 치료로, 장기 투여 시 환자와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이 된다.
하지만 일부 환자에서는 면역항암제 사용 2년 후에 치료를 중단해도 암이 다시 진행되지 않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는 기존 항암치료에서 보기 어려웠던 현상이다. 종양내과 전문의들은 “면역항암제를 쓸 수 있는 상태만으로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인식한다”며 “암치료 목표가 암과 공존하면서 얼마나 오래 잘 살 수 있는가”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