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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치료를 거부합니다” 대구 10월 사건의 진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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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사건에서 또 하나의 큰 충격을 준 것이 대구의사회의 경찰관 치료 거부였습니다. “10월 2일 대구경찰서원 수백 명이 빈사의 중상을 입고 입원하려 했으나 시내 각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부들의 공동 성명에 의한 ‘발포를 중지하지 않는 이상 경관의 치료 진찰은 거부한다’는 것으로 입원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동아일보 1946년 10월 15일 자)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독립신보도 ‘대구의사회가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946년 11월 1일 자)고 보도했습니다. 전쟁 중 적군도 치료하는 것이 최소한의 인도주의인데 죽어가는 경찰관들의 치료를 왜 거부했을까. 좌익 의료진이 이런 방법으로 ‘투쟁 대열’에 참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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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일 출신인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의 자서전 <나의 정경(政經) 50년>에는 끔찍한 목격담이 실려 있습니다.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의 의사가 떠밀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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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치료가 거부되자 병원은 오히려 좌익 세력이 경관들을 살해하는 길목이 됐습니다. 당시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10월 사건을 취재한 정영진의 저서 <폭풍의 10월>(1976,한길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도립병원 정문 앞 원형 화단 둘레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호송해 왔는지 빈사 상태의 경관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중 몇 사람이 고통으로 몸부림치거나 죽음 직전의 경련으로 몸을 떨자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소리치며 둘레의 청년 7~8명이 몽둥이로 확인 타살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원한이 깊다고 해도 반송장이 되어 병원에 실려 온 중환자에게까지 저럴 수가 있을까.”

10월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대구 출신 교사 석정길의 저서 <새벽을 달리는 동지들>에는 “도립병원 안에 폭도가 끼어 있어 입원한 경찰관들을 죽이기도 했다”는 기록까지 나옵니다. 의료진의 경찰관 치료 거부는 이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의사들에게 보복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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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좌익 세력은 경북 곳곳으로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조공(조선공산당),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민위원회, 부녀총동맹,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조공 전위 조직), 좌익 학생들은 50~100명씩 조를 짠 뒤 조장을 뽑고 환이(丸二)화물의 화물차, 대구시청의 시영버스, 개인 자동차를 탈취해 경북 22개 군청 소재지로 진격했습니다. 대구 시위대와 합세한 현지의 좌익 세력은 곳곳에서 학살을 저지른 뒤 시신의 머리를 자르고, 얼굴의 껍질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대구치안총사령관으로 파견된 한종건 미군정 경무부 공안국장 발표, 조선일보 1946년 10월 29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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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새벽 5시 50분쯤 왜관경찰서가 습격당했습니다. 시위대는 서장 장석한 경감의 눈을 파내고 혀를 자른 뒤 몽둥이로 타살하고 다른 네 명의 경찰관도 도끼로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붉은 대학살>1979, 송효순 예비역 준장이 6·25전쟁 전후 좌익에 의한 학살 사건들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20여 년간 증언을 수집해 발간한 저서, <재팬 다이어리>(Mark Gayn·당시 극동특파원이었던 미국 기자, 1948)

영천군 화산지서에서는 경찰관이 산으로 도망가자 쫓아가 낫으로 두 눈을 뽑아 죽인 후 집에 불을 지르고 가족 5명을 불속에 집어넣어 살해했습니다. 영천군 자양지서 경찰관과 가족들은 한 팔, 한 다리에 3~4명씩 달라붙어 있는 힘을 다해 찢어 죽였습니다. 한 경찰관의 부인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이런 만행을 당했습니다.(송효순 <붉은 대학살>) 상주에서는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관 5명을 생매장해 죽였습니다. 상주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 주동자들은 10월 25일 마산에서 체포됐습니다. 칠곡 시위대는 파면된 상태였던 35세의 서장 윤상탕 경감을 집 앞에서 붙잡아 죽창, 낫, 곤봉 등으로 살해했습니다. 성주에서는 10월 4일 새벽 3시 서장 등 경찰관 22명을 경찰서에 감금한 후 불을 질러 태워 죽이려다 방화 직전 충남에서 기동경찰대가 도착해 미수에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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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혹했던 곳은 영천이었습니다. 당시 대구시보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10월 3일 오전 1시경 군내에 일제히 봉기한 수만의 폭도들은 ’38선은 이제 철폐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우리 동포들은 굶주린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남조선으로 들어왔다. 자, 굶주린 동포들은 일어나라!' 이렇게 외치며 읍내를 포위했다. 이들은 경찰서를 습격, 방화한 뒤 군수 이태수를 사택에서 끌어내어 잔학한 방법으로 죽인 다음, 몸에 석유를 뿌려 불타는 군 청사 내에 던져 생화장에 처하였다. 폭도들은 방화, 학살, 약탈과 파괴를 거듭하여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 출장소 등을 방화, 전소케 했다. 또 부잣집을 습격하고 역시 방화, 가산을 약탈했다. 이때 임고면의 이인석, 정도영 양(兩)씨도 피해를 입었고, 특히 이인석 씨는 네 살 먹은 외동손자까지 참살당하였다. 군내 각 면사무소, 각 경찰지서는 물론 신령면 같은 곳에서는 성당, 교회, 소학교까지 불태워졌고 전도사까지 학살당하였다. 10월 8일 현재 군내 피해상황은 전파(全破) 가옥 200호, 반파 가옥 약 1천 호, 경관을 포함한 관공리(官公吏) 사망자 16명, 중상자 19명, 일반인 사망자 약 24명, 피해액 약 10억원, 본서와 지서에 보관된 무기 전부가 탈취 당했다고 한다.”(대구시보 1946년 10월 13일자)

10월 3일 구미경찰서를 점령하고 경찰관들을 감금했던 선산군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박상희는 이틀 뒤 진압군에 사살됐습니다. 박상희는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경북 안동 태생으로 목사 출신인 이재복은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9월 총파업과 10월 사건을 실행한 주동자였습니다. 이재복은 박상희의 장례 비용을 모두 대주고 유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돌봐주며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로 교육받던 박상희의 동생 박정희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박정희 소령은 1948년 11월 남로당 숙군 때 적발돼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실질적인 활동을 한 바 없었고, 숙군 수사에 협조한 점이 감안돼 사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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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사건은 전국에서 급파된 경찰 4500명, 김두한이 이끄는 우익 청년 3000명, 대전 2연대 1개 중대, 미군 2연대가 총출동해 겨우 진압됐습니다. 계엄령은 10월 21일에야 해제됐고, 완전한 사태 수습은 연말이 돼서야 이뤄졌습니다. 대구 시내에서만 경찰관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고, 경북에서는 경찰관 80명, 공무원과 민간인 24명이 사망했으며 행방불명, 납치가 145명에 달했습니다.(당시 주한미군 G-2 정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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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피의 보복을 벌이는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과잉 진압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양민도 많았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명예 회복과 보상이 마땅히 이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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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소요의 불길을 전국으로 퍼뜨리려고 했습니다. ‘호응투쟁’ 전개 지령이 내려졌습니다. 10월 3일 서울에서는 만 명이 미군정청 앞에서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남 통영과 충북 영동에서는 수백 명이 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1946년 10월 5일 자 동아일보) 10월 5일 부산, 인천, 군산, 목포, 여수, 마산, 통영 등에서 부두 노동자 1만5000명이 ‘동정파업’을 벌였고, 10월 20일 경기도 개성, 봉동, 임한, 연안, 백천, 대성, 장단, 광주 등에서 경찰 지서가 습격당했습니다. 10월 30일 전남 화순의 탄광 노동자5000명이이 파업했고, 목포에서는 1500여명이 목포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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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도 전남 장성의 지서와 보성의 득량지서가 습격되고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 2명이 학살됐습니다. 전남 해남에서는 지서와 면사무소가 불에 탔습니다. 11월 11일 오후 2시 전주형무소 죄수 842명 중 417명이 간수들의 무기를 빼앗아 탈옥했고, 22일 광주에서는 900여 명이 탈옥하려다가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죄수 4명이 죽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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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좌익의 폭력 투쟁에는 공통 양상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둠이 깔려 있는 이른 아침 시간에 공격하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많은 공격이 새벽 1시에서 5시 사이에 행해졌다. 경찰서를 공격할 때 어린아이들을 맨 앞에 세워 경찰이 군중들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도시의 주요 경찰서에서 미군 부대를 끌어내기 위해 외곽에 있는 경찰 초소를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능하면 공문서를 없애고, 특히 쌀이나 곡물 수집에 관한 기록을 없애버렸다. 농민들은 폭력을 동원한 협박과 때로는 창끝에 몰려 원하지 않아도 참여해야 했다. 선동가들은 후방에 있었으며,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폭동 이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우익 완장을 차기도 했다.”(주한미군 G-2 정보보고서·1946년 12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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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비극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폭력사태가 시작된 10월 2일 북한 통치자였던 소련 중장 스티코프는 활동자금으로 일본돈 3백만 엔을 남한에 추가로 내려 보내라고 지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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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에도 스티코프는 ‘로마넨코(북한 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의 계좌에 있는 122만 루블을 박헌영에게 전달했다’고 비망록에 썼습니다. 현재 화폐 가치로 최소 수십억 원대입니다. 10월 사건의 불길이 전국을 휩쓴 석 달 동안 소련 군정은 세 번이나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남한에 내려보냈습니다.(10월 2일 300만엔, 12월 6일 39만엔, 12월 7일 122만 루블). 이것은 날짜와 액수까지 기록한 스티코프의 비망록이 1995년 발굴되면서 49년 만에 밝혀진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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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사건은 미군정하에서 합법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과 공산주의가 짧은 기간 남한의 도시와 농촌에까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해방 직후 공산당은 건준과 인공 조직을 통해 접수한 일본인들의 적산 재원으로 불과 몇 달 사이에 6천만 원이란 돈을 만들어 뿌려댔다. 사대문 안의 새로 지은 기와집이 2만원 남짓하던 당시, 현재 시세로 2조 이상의 정치자금을 살포한 것이다. 이 돈을 다 쓰자 소련 군정당국이 적군 군표와 환전하게 한 북한의 조선은행권이 서울로 유입되었다. 다시 몇 달 뒤에 공산당은 위조지폐까지 찍기 시작했다. 46년 5월 15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그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런 돈들이 아사 직전의 농촌에 방대한 공산당의 외곽단체를 출현시켰다.” (이인화 <인간의 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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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 ‘적도(赤都, 붉은 도시)’로 불릴 만큼 좌익 세력이 강했던 대구에서 시민들이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이들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조선공산당(1946.11.23 3당 합당으로 남로당으로 개칭)도 1500명이 구속되고 5명은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수배된 좌익분자들은 월북하거나, 태백산·소백산에 입산해 ‘구 빨치산’의 원조가 됐고, 사상과 신원 검증이 허술했던 대구 6연대를 도피처 삼아 대거 입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1948년 11월 일어난 대구 6연대 반란사건의 씨앗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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