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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비켜” 연 650만 홀린 국중박의 ‘보이지 않는 손’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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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을 ‘지금·여기’와 잇는 ‘통역사’인 학예연구사

“반가사유상만 힙한가? 고서도 힙할 수 있다”

고증하되, 말하듯 쉽고 재미있게…‘공감하는 글쓰기’

책을 비롯해 서가의 귀중한 물건들을 함께 그린 그림을 책가도라고 한다. 조선시대 화가 이형록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책가도에, 학예연구사를 비롯한 국립 박물관 관계자들이 출간한 책의 이미지를 합성해 ‘오늘의 책가도’를 형상화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재가공

반가사유상과 달항아리, 까치호랑이가 ‘힙’해지는 시절이 올 거라고, 20세기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센터’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은 연간 관람객 650만명을 돌파하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2024년 기준 873만명)과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682만명)에 육박하는 인파를 끌었다. 몇년간 우상향해온 인기에는 여러 배경이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이 증명하듯 케이(K) 컬처의 부산물로 우리 역사를 긍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혁신적 디자인의 ‘뮷즈’(박물관 기념품)가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2021년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도 풍성한 마중물이 됐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쉬 꺼지지 않는 국중박 붐의 진짜 공신은 따로 있다.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이 낡은 것들을 대중에게 빛나는 존재로 다시 서게 하려면, ‘보이지 않는 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큐레이터라고도 불리는 학예연구사(학예사)들의 글 쓰는 손이야말로 열풍의 중핵이다. 유물을 대신해 말하는 학예사들은 오래된 말을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통역사에 가깝다. 쉬운 전시 정보를 만들고 박물관 문턱을 낮추려 애써온 그들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박물관 열풍을 지탱한다.

최근 몇년 새 출판가에 바로 그 보이지 않던 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도록과 논문을 넘어 대중과 만나는 책을 펴내는 학예사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정초 출간된 ‘고서의 은밀한 매력’(이재정 지음)과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강민경 지음)는 모두 국중박 전현직 학예사가 쓴 역사서다. 여러 신문 지면에서 일제히 소개될 만큼 두 책 모두 읽는 재미가 있고 완성도도 높다. 이들뿐 아니라, 학예사들은 전공을 풀어낸 학술서부터 어린이용을 포함한 교양서, 유물을 고리 삼은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펴내며 ‘파워 라이터’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 학예사는 ‘전천후 글쓰기’ 라이터?

늘 새로운 저자를 발굴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출판사 편집자들에게 학예사는 “준비된 저자”다. “학예사들은 믿음이 가요. 첫째, 대중과 소통하려는 의지. 글이 쉽고 매끈합니다. 둘째, 기획력. 요새 국중박 기획전들을 보면 무척 감각적이지요. 셋째, 교정자로서도 신뢰가 갑니다. 교정 하나 틀릴세라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쓰더라고요. 철저합니다.” 역사책을 주로 출간해온 박혜숙 푸른역사 대표의 평이니, ‘연대보증’의 가치가 높겠다.

지난해 취임한 ‘스타 저자’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시 학예사 글쓰기의 강력한 연대보증인이다. 유 관장은 20년 전 문화재청장을 지낼 때부터 학예사들에게 대중서 출간에 적극 나설 것을 당부해왔다고 한다. “프로페서(교수)와 큐레이터는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대변하는 양대 산맥이다. 이 두 직군이 열심히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사회적 책무다.” 복수의 관계자들이 전한 유 관장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이와 같다.

이런 기류를 반영한 듯 국중박 박물관상품관 한구석에는 전시 도록뿐 아니라, 국립박물관 학예사들이 낸 책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국중박 최대 명사인 유 관장의 책을 비롯해 박물관이 관람객들의 목소리를 모아 엮은 ‘유물멍’(세종서적), 국중박 학예사들과 국립국어원, 국어문화원연합회 등이 함께 쓴 ‘박물관의 글쓰기’(이케이북)가 서가를 채웠다. 아울러 고고역사부장을 지낸 김상태 국립나주박물관장이 쓴 ‘단단한 고고학’(사계절), 장용준 국립진주박물관장이 쓴 ‘사람·돌·불’(진인진), 신지은 학예사의 ‘박물관을 쓰는 직업’(마음산책) 등 장르를 넘나드는 책들이 눈에 띈다.

국립박물관 학예사의 글쓰기가 이처럼 강력 추천을 받는 것은 이들이 쉽고 간명한 언어, 치우침 없는 언어로 유물의 이야기를 쓰고 말하기 위해 혁신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학교 등에 몸담은 전문 연구자와 달리, 학예사들은 비슷한 전공(고고학·미술사학·사학 등)에 바탕을 뒀어도 박물관에 근무하는 동안 대중적 글쓰기를 몸으로 익히게 된다. 논문도 쓰지만, 전시원고·설명카드·도록 작성이 주된 업무고, 보도자료, 오디오 가이드용 원고에 영상 원고까지 전천후 글쓰기를 훈련한다.

고서의 은밀한 매력 I 이재정 지음, 푸른역사(2026)

국중박 학예연구관,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을 지내고 퇴직한 이재정 작가의 ‘고서의 은밀한 매력’에서 어려운 걸 쉽게 쓰는 학예사 글의 강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금속활자 전문가가 고서 편집을 주제로 쓴 책이라니, 한줄 소개만 들어도 어질어질해질 것이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이 힙해졌으니, 고서도 힙해질 수 있다’고 믿는 이 전 연구관은 한글 창제 초기에 인쇄한 책 ‘월인천강지곡’에 대해 설명할 때 “한글을 먼저 쓰고 한글 뒤에 한자를 병기한 책”임을 강조해 책의 가치를 단박에 전달한다.

충남 대천해수욕장 인근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를 두고 “58×96자 원고지” 비면에 제목·저자·서자(글씨를 옮겨 쓴 이)까지 새긴 비문임을 24쪽에 걸쳐 설명하는 ‘돌에 새긴 책’ 꼭지에 이르면 ‘이렇게 재미없을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하는 감탄이 나온다. “논문을 쓸 때는 논리정연하게 주장을 끌어가야 하지만, 박물관에서 글을 쓸 때는 유물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도, 트렌드에도 맞아야 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책을 쓸 때 그런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소장품 하나를 두고 글을 쓰듯이, 고서들을 하나하나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풀어봤어요.” 지난 9일 한겨레와 만난 이 전 연구관의 설명이다.

대중적 글쓰기를 훈련해온 국립 박물관 학예사들이 저자로 주목받고 있다. 12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상품관에 학예연구사들의 책이 진열돼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 감성·감수성까지 한 스푼…‘학예사 글쓰기’의 진화

쉬운 글을 넘어,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글을 쓰기 위한 국립박물관의 노력은 용산으로 옮겨 재개관한 뒤,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2018년 국립국어원, 국어 전문가, 역사 교사에게 의뢰해 국립박물관 13곳의 설명문 전체에 대한 의견을 받았다. 전시 용어를 개선하며 3차, 4차 감수에 중학생들까지 빨간 펜을 들고 나섰다. 새 시대의 감수성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 지난한 개선 작업과 내부 ‘캠페인’의 결과물이 2023년 출간된 ‘박물관의 글쓰기’다.

이 책 출간을 주도한 정명희 미래전략담당관은 그 자신도 ‘한번쯤, 큐레이터’(사회평론아카데미) ‘멈춰서서 가만히’(어크로스) 등 두권의 에세이와 벽돌책 ‘조선의 불교회화’(사회평론아카데미)를 펴낸 저자다. 국중박 내에서 “친절하고 쉬운, 게다가 다정한 글쓰기”를 목놓아 외쳐온 정 담당관이 생각하는 박물관은 20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이 생각하듯 “하나라도 더 배워 가야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의 책 제목대로 “멈춰서서 가만히”, 그저 “유물 앞에 오래 서 있는” 공간이어도 괜찮다.

멈춰서서 가만히 I 정명희 지음, 어크로스(2022)

“20년 전 용산으로 이전 개관할 때 박물관에 처음 어린이박물관이 생겼어요. 학부모들은 뭔가 자꾸 배워 가고 싶어 하시지만, 저희는 ‘절대 애들한테 뭘 읽어라, 적어라 하지 마시라’고 당부해요. 어린이박물관이 처음 생겼을 때 억지로 끌려왔던 아이들이 박물관을 그냥 놀다 가도 되는 공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자라서 박물관을 즐길 줄 아는 세대가 됐다고 봅니다.” 정 담당관의 설명이다.

공부보단 공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때, 유물은 우리 곁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쉴 수 있다. 학예사들의 이런 노력으로 박물관은 더 이상 ‘지식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경험하고 해석하는 문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전시 패널을 비롯한 박물관 전시 원고들에도 이런 분위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3년 전 정년퇴직한 이재정 전 연구관에게도 후배들의 글쓰기는 새롭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무척 놀라요. 우리 때만 해도 정보 전달 위주로 딱딱한 글쓰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무척 글의 내용이 와닿고, 어떤 의미에선 감성적이기도 하더라고요. 아마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글이겠지요.”

30대인 강민경 학예사에게 ‘공감하는 글쓰기’의 원칙은 공기처럼 익숙해 보였다. 첫 책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에 이어 출간한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에서 강 학예사는 유튜버만큼이나 날렵한 말씨의 글을 구사한다. 그는 “책 전체를 구어체로 쓰고 싶었지만 퇴고 과정에서 많이 고쳤다”고 했다. ‘명필로도 알려진 매국노 이완용이 정말 붓글씨를 잘 썼는가?’ 책은 이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하지만, 흔한 ‘유사-역사학자’들과 달리 철저한 고증과 논리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아침이 시작된다. 서양맥죽(오트밀), 달걀프라이,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에 과일 몇 조각, 거기에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커피까지. 하나같이 옻칠한 소반 위에 올라가기엔 낯선 것들이다. 하지만 여기 이곳에서만큼은 낯익은 풍경이다. 이 집 주인이 바다 건너 미리견(미국)을 다녀오면서 들인 습관이다.” ‘매국노 일당 씨의 하루’를 재구성한 책의 앞머리다. “소설 읽어주는 전기수처럼, 통역사처럼,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다”는 강 학예사의 말이 수긍되는 글이다.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I 강민경 지음, 푸른역사(2026)

강 학예사의 책에서 역적 이완용은 뼈와 살을 가진 존재로 다가온다. 딱히 이완용의 선택에 공감이 간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도 있을 법한 존재로 그려진다는 뜻이다. “나이 10세에 집을 떠나 남의 집 양자”로, “시골 선비의 둘째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고관 댁 도련님”으로 변신한 이완용의 내면세계와 그의 붓글씨의 상관관계가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유명 정치인이 꼭 어마어마한 명필이어서 그의 글씨가 주목받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600만 관람객과 교감해온 학예사들은 역사도 유물도 지금, 여기와 함께 호흡할 때만 의미 있다는 걸 체감하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유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걸 저희는 나와 같은 시대를 숨 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알려줄까, 고민하고 번역해서 알려주는 통역사에 가깝지요. 쉬운 글이 깊이가 없는 글은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요즘의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쉬운 글이지요.”

학예사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옛날의 말을 통역하는 사람이자, 들리지 않는 유물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고 ‘물건’의 말을 대중에게 전하는 사람이다. “같은 것을 보아도 만명에게는 만가지 이야기가 있다”(정명희 담당관)고 말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우리 시대의 전기수를 자처하는 한, 국중박 열풍은 앞으로도 쉬 꺼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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