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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의 젊음 스러진 이곳…40년 단종 연작이 움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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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역사화 40년 그린 서용선 작가와 함께 찾아간 영월 단종의 흔적들

4~5월 작업 정리한 전국 전시와 작품담론집 출간

서용선 작가가 1987년 단종 연작의 첫 작품으로 그린 ‘청령포, 노산군’. 일렁거리는 강물에 빠진 소년 단종의 알몸뚱이를 묘사했다. 연립서가 제공

“여기 강물에 단종이 빠져 죽었다는군.”

40년 전인 1986년 7월 여름날이었다. 강원도 영월 서강 쇠목 강가 돌밭에서 천막 치고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삼촌 수양대군한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배 와서 살해당한 세종대왕 장손 단종의 야사를 털어놓았다. 그들의 눈앞으로 서강의 아련한 물살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물소리와 친구가 귀띔한 구전의 역사를 듣고 마음이 울렁거린 35살 화가 서용선은 알몸으로 물에 빠진 소년 군주 단종의 젊은 육체가 푸른 물결 속에 내려앉는 모습을 떠올렸다.

친구의 말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었지만, 이듬해 작가는 상상을 실제로 그려냈다. 소년 단종의 알몸이 유배지의 강 속을 떠도는 그림이었다. 화폭 속 단종은 눈을 가늘게 내려 뜬 채로 푸른 물살의 윤곽선이 일렁거리는 화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 싱그러운 젊음이 물속으로 침잠해 가는 풍경, 역사 속 청춘의 비극적인 순간이 닥지 종이 화폭에 푸른빛 일색의 아크릴 안료로 그려졌다. 작품 제목은 ‘청령포, 노산군’.

소나기 재 전망대에서 청령포로 가는 서강변 쇠목을 가리키는 서용선 작가. 쇠목 강변에서 그의 단종 연작 첫번째 작품이 탄생했다. 노형석 기자

이제 국내 리얼리즘 화단에서 대가로 꼽히는 서용선(75) 작가는 지난 21일 낮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서강변 쇠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월 소나기재 꼭대기 전망대에 감회 어린 표정으로 섰다. 그는 아래 강변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 작품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40년째 이어지는 역사화 단종일기 연작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지나도록 연작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저도 잘 믿어지지 않아요. 단종의 주검을 시작으로 연작들은 수십년간 인물과 공간을 넓혀가며 가지를 쳐 나갔어요. 모호한 역사적 사실과 배경에 대한 호기심이 작업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었지요. 근본적으로 저의 단종 역사화 연작은 인간 조건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어요. 인간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역사 속에서 기억과 권력, 감정은 자연과 어떻게 어울리며 나타나는가라는….”

작가의 1990년작 ‘엄홍도, 노산군’. 동강 물길을 두고 마주보는 단종과 엄홍도의 만남을 묘사한 그림이다. 연립서가 제공

단종 연작들은 초창기 생전 단종과 사후 단종의 풍모, 그가 있던 서울의 궁궐과 영월 유배지 청령포를 거쳐, 관아 관풍헌 건물이 강물과 산을 배경으로 나타났다. 뒤이어 단종의 주검을 수습한 지역 관리 엄홍도와 단종을 몰아낸 삼촌 세조, 그를 끝까지 섬긴 김시습 등의 사육신과 생육신을 필두로, 서울 궁궐에서 암투 중인 신하와 왕족들, 단종 사후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한 시녀와 시종, 단종의 이야기를 전승해온 지역의 민중 등이 적·청·흑·백색의 음울한 표현주의적 색채 속에 명멸하면서 이어졌다. 역사에 둔감한 한국 화단에서 예술가의 해석을 통해 과거를 복원하는 전인미답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작가는 지금도 답사와 드로잉, 붓질 작업을 지속 중이다. 역사화의 대상 또한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과 일제강점기 암태도 소작 투쟁, 제주 4·3항쟁, 한국전쟁과 노근리 학살 등으로 근현대까지 확산됐다.

지난 22일 단종의 장릉 봉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영목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와 서용선 작가. 노형석 기자

40여년간 집요하게 단종과 계유정난 역사화 작업을 벌여온 서 작가는 지난 21~22일 단종 연작의 모티브가 된 강원도 영월 일대를 돌아보는 답사 기행을 벌였다. 다음달과 5월 영월관광문화센터와 제이제이(JJ)갤러리 등 서울의 네 화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단종 관련 그림들을 합동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그림의 태반이 된 영월 서강과 동강,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 무덤 장릉 등을 다시 찾았다. 올해 합동 전시까지 서 작가의 여러 전시를 기획해온 정영목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가 동행했다. 정 교수는 1993년 단종 역사화를 처음 화단에 알린 신세계갤러리의 개인전 ‘단종일기’를 준비하면서 전시 평론 필자로 인연을 맺은 이래 역사화 담론과 단종 연작의 창작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아온 친구 사이다.

서용선 작가가 1988년 그린 아크릴·색연필 그림 ‘엄흥도, 노산군’. 연립서가 제공

21일 오전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낙화암 절벽이었다. 주산 봉래산 자락 아래 자리한 낙화암은 단종이 사약을 받은 뒤 따르던 궁녀와 시종들이 몸을 던진 곳. 작가는 동강의 푸른 물살을 내려다보며 2006~2007년 투신한 궁녀들을 소재로 작업한 ‘낙화’의 현상적 의미를 풀어냈다. “고대 중국의 대시인 굴원의 시 중에 하늘에 묻는다는 의미의 천문이란 대목이 있어요. 인간에게 하소연할 데가 없으면 대자연에 결국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 궁녀와 시종들은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었고 오직 저 아래 바로 수직의 시선으로 보이는 검푸른 물살을 바로 접했을 때 한 발만 뛰면 고통을 접을 수 있다는 충동을 느꼈을 겁니다. 10여년 전 낙화 그림을 그린 것도 그림을 통해 훨씬 더 풍성하게 당대 사람들의 마음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2006~2007년 그린 아크릴 작품 ‘낙화’. 단종이 세상을 뜨자 뒤따라 동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한 궁녀와 시종들을 그렸다. 연립서가 제공

발길은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로 이어졌다. 서늘하고 맑은 동강과 서강이 합수하는 곳에 튀어나온 반도 모양의 청령포는 강 돌밭과 단종 거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울창한 소나무 숲, 뒤편의 기암절벽 등으로 이뤄진 공간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몰이로 많은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이들이 쌓은 돌탑들도 강변에서 볼 수 있었다. 분주한 현장 분위기와 달리 작가와 정 교수는 청령포 솔숲 한가운데 위치와 얼개 구조가 구체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채 엉성한 기와집이 들어선 모습을 보고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은 물론 역사화의 작업에도 이질적인 걸림돌처럼 비친다”며 방치된 안쪽의 다른 공간을 더 눈여겨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청령포의 핵심은 음의 기운으로 휘돌아가는 동강·서강의 물줄기”라며 “청령포 물줄기는 양에 대비되는 기운을 지님과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자연과 항상 교직하며 흘러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풀었다.

지난 21일 낮 서용선 작가와 방문했을 때 청령포 전경. 노형석 기자

다른 조선왕릉과 달리 급경사 능선에 자리잡은 장릉에선 위리안치하듯 봉분에 찰싹 붙인 담장 등 무리하고 과잉된 복원의 생채기를 느꼈다는 작가의 말이 이어졌다. 소나기재에서 장대하게 장릉으로 이어져내려오는 고개길의 엄숙한 분위기를 살리던 소나무 장송들이 차량 매연으로 대부분 말라죽으면서 사라져버린 사실도 못내 안타까워했다.

서강의 앞 물줄기인 주천강 자락의 연미정에서 발견한 역동적인 고려 마애불의 바위 덩어리는 강고한 설치작품처럼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단종의 애사보다 훨씬 앞서 조성됐고 그 이후에도 이 지역 민중의 염원을 안고 풍화를 견뎌온 이 마애불은 또 어떤 역사적 의미를 품고 있을 것인가. 가해자 세조가 정변 뒤 후원한 불교, 민중의 불사 염원은 단종의 삶과 또 어떤 기억의 고리로 이어지는지가 새로운 화두로 와닿았다.

계유정난과 단종의 장릉에 얽힌 이야기들을 텍스트와 이미지를 결합시켜 표현한 서 작가의 미완성 대작. 22일 그의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찍은 것이다. 노형석 기자

작가는 4월 그의 역사화 여정과 영월 단종 관련 유적, 문헌의 역사적·미술사적 의미 등을 정 교수 등 4명의 필자와 함께 정리하고 단종 연작 그림과 드로잉 150점의 도판도 함께 실은 자료집 ‘단종그림’을 출간한다. 출간과 함께 여는 전시 관객들과 영월 답사투어(4월30일), 세미나(5월6일)도 벌일 예정이다. “단종 역사화는 아직도 장면의 생동감을 얻지못해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느낌”이라는 작가가 중간 정리 성격으로 내놓게 될 이 저술은 그간 누구도 구상하지 않았던 독창적 기획이라고 할 만하다. 정영목 교수는 “40년에 걸쳐 담론, 글, 작품과 함께 이어지는 서용선의 단종 역사 탐구 여정은 서구에서 18세기 낭만주의 거장 고야의 전쟁·카프리초스 판화 연작에 비견할 만한 미술사적 성취로 두고두고 탐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상찬했다.

영월/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영월군 무릉리의 고려시대 마애석불좌상을 보고있는 서용선 작가와 정영목 교수. 노형석 기자

장릉을 돌아보고 홍살문을 지나 나오고 있는 서용선 작가. 노형석 기자

청령포 솔숲 안쪽에 세워진 금표비 앞에서 서 작가가 이곳을 돌아본 감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21일 청령포 숲 속 단종의 유배지를 돌아보고 나오는 정영목 교수(왼쪽)와 서용선 작가.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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