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이후 국제질서 재편해 온 미국
달러패권·금융망·첨단기술 무기화
재무부 출신이 밝힌 ‘보이지 않는 전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4월2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 행사를 열어 새로운 상호관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하워드 루트닉 상무장관이 발표 내용을 옆에서 듣고 있다. 미국은 이처럼 관세·금융망·기술 등을 무기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경제전쟁’을 펼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는…무계획적으로 형성되는 중이며 각각의 새로운 관세, 제재, 수출 통제가 벽돌이 되어 쌓이듯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다. 청사진 따위는 없다. 건축가도 없다. 검증되지 않은 경제무기를 휘두르는 소수의 강대국과 그 결과에 대한 잦은 오판이 있을 뿐이다. 경제전쟁의 시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에드워드 피시먼,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미 외교협회(CFR) 지경학 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인 에드워드 피시먼이 쓴 ‘국가는 무엇으로 싸우는가-초크포인트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은밀한 전략’은 바꾸어 말하면 ‘세계화 이후 미국은 무엇으로 싸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은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앞세웠지만, 이제는 그동안 축적한 금융·기술 지배력을 활용한 경제 무기로 경쟁국을 압박하는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책은 미국이 달러패권과 국제 금융·기술네트워크 통제력을 무기 삼아 세계 질서를 재편해 온 21세기 초 지난 20년의 경제전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 재무부 테러·금융정보국과 국무부 이란 제재팀에서 근무했던 지은이는 1990년대 세계화의 전성기가 점차 쇠퇴하고, 제재, 관세, 수출 통제가 강대국 간 경쟁의 주요 수단이 되기까지 흐름을 ‘때리는 사람’의 시점에 서서 추적한다.
책의 원제인 ‘초크포인트(Choke Point)’는 적의 이동을 제한하고 방어를 유리하게 만드는, 좁고 중요한 길목이나 지정학적 요충지를 일컫는 말이다. 호르무즈 해협처럼 특정 통로가 막히면 세계 에너지와 식량 공급이 흔들리는 곳을 뜻한다. 지은이는 오늘날 초크포인트가 물리적 해협을 넘어 달러, 국제금융 네트워크, 첨단 반도체 등 핵심 기술과 지식재산 같은 경제 인프라로까지 확장됐다고 설명한다. 경제전쟁 시대에 국가는 제재·수출 통제·투자 제한 같은 ‘경제 무기’를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초크포인트를 장악할 수 있다. 예전에는 다른 나라의 경제를 파괴하려면 항구를 봉쇄하고 도시를 포위해야 했지만, 이제는 미국 정부가 온라인에 올리는 단 한 줄의 성명만으로도 가능하게 됐다.
책은 2006년 이후 미국이 경제전쟁을 본격화한 네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첫째, 이란 핵 프로그램을 겨냥해 이란을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사실상 고립시키고 석유 이 정권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해외 조건부 계좌에 묶어 둔 금융 제재이다. 이란 제재는 미국이 ‘경제전쟁 시대를 연 첫 실험이자 교본’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멈추려면 단순한 무역 제재가 아니라 정권이 견디기 힘들 만큼의 경제적 고통을 줘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이란을 미국 시장이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에서 고립시키는, 전례 없는 규모의 금융제재 구상을 시작한다. 미국은 항구를 봉쇄하는 대신 이란 중앙은행으로 향하는 지급 통로를 감시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 급등과 재정 악화로 이란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2015년 핵협정 타결을 끌어낸다.
둘째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가해진 제재, 셋째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겨냥해 중국 기업들이 첨단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 한 대응, 넷째 2022년 러시아의 전면적 우크라이나 침공에 뒤이은 초강도 경제전쟁이다. 네 가지의 경제전쟁은 이란(부시와 오바마)-러시아(오바마)-중국(트럼프 1기)-러시아(바이든) 순으로 대통령의 집권 시기와도 연결할 수 있다. 시기마다 대통령의 발언과 결정의 순간, 미국의 ‘달러 패권과 반도체 등 첨단 기술의 무기화 과정’을 들여다보면 제재의 기원과 작용 경과, 제재 수단의 허점과 보완을 통해 미국이 이권을 어떻게 강화해 나갔는지 알 수 있다.
국가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l 에드워드 피시먼 지음, 이성민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4만3000원
그리고 트럼프의 시대가 열렸다. 트럼프가 경제전쟁의 시대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속도와 성격을 바꿔 놓았다. 트럼프는 세 가지 면에서 전임자들과 완전히 결이 달랐다. 트럼프는 첫째 미국이 지닌 금융·기술 우위를 극대화하기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무역’을 전장으로 택해 관세를 주요 무기로 사용했다. 둘째 한국·캐나다·유럽연합(EU) 같은 동맹국들까지 제재·관세의 대상으로 삼아 미국 경제 무기의 조준점을 적대국에서 동맹국으로까지 확장했다. 셋째 제재·관세·수출 통제를 상대 행동을 일시적으로 수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계 경제 구조를 영구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지은이는 이러한 트럼프의 세 가지 특징이 결국 세계 경제와 국제 질서 전반에 심대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트럼프가 미국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인 무역 영향력을 무기로 삼는 바람에 국가 경쟁력의 진정한 초석인 미국 금융패권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은이가 과거 미 국무부의 정책기획실에서 경제 제재의 전략을 짠 당사자이기도 한 만큼 책은 ‘미국이 무엇으로 싸우려 하는지’ 그 흐름과 의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컬럼비아대 국제·공공정책 교수로서 학문적 엄격함도 상당하다. 100여명이 넘는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의 광범위한 인터뷰와 꼼꼼한 자료 수집을 보면 이 책이 ‘조선왕조실록’처럼 앞으로 미국의 경제전쟁을 기록한 1차 사료 역할을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지은이가 군사력이 아닌 ‘경제전쟁의 시대’를 선포했지만, 트럼프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일방적 핵 협정파기와 그 결과 일어난 최근의 미-이란 전쟁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듯도 하다. 오늘의 상황을 예측이나 한 듯 지은이는 책의 결론에서 “더욱 암울한 시나리오도 있다”고 부연한다. ‘지정학적 갈등을 경제 분야로 옮길 능력이 없어진다면, 강대국들은 다시 한 번 실제 전장에서 싸우게 될 수도 있다. 경제전쟁이 가진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좀 더 폭력적인 형태의 전쟁을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경제전쟁의 시대도 끝나겠지만, 막상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 시대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