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프랭크가 말한 ‘고통 서사’ 세 유형
‘복원 서사’보단 ‘혼돈 서사’ 많은 환자들
정돈되지 않은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야
파블로 피카소의 ‘우는 여인’(1937). 피카소는 고통 앞, 지각의 분절과 감정의 붕괴를 큐비즘으로 시각화한다. 우리의 고통 서사는 통일되고 안정적인 복원 서사이기 어렵다. 위키피디아
김준혁의 미래 의료인을 위한 책장
예외 없이, 습격은 밤에 찾아온다. 지금은 놓고 있지만 오랫동안 소아치과 전문의로 일해왔기에 사실 성인의 치통을 치료한 건 무척 오래전의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치통을 치료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해서, 치통이 나를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생각하면 내가 그 희생양이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예견되었던 범죄가 저질러졌을 뿐.
일과를 마치던 즈음 그야말로 당이 부족한 상태가 되어,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던 달짝지근한 초콜릿을 하나 베어 물었다. 그때부터였다. 통증은 점차 심해졌고, 저녁을 먹을 때쯤부턴 식은땀마저 나기 시작했다.
놈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책은 두가지, 하나는 얼음을 씹는 것, 다른 하나는 빨리 치과에 가서 신경치료를 시작하는 것. 첫번째 방편은 어렵지 않았지만 두번째가 문제였다. 이미 시간은 저녁 8시. 야간 진료를 한다는 치과를 수소문해서 방문했지만 지금 치료하는 것은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다. 그제야 치과 전문의이고 치과대학 교수라는 이야기를 하며 사정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음을 깨달은 것은 이 모든 사건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강력한 진통제만 처방받아 들고 나온 나는, 자신이 속절없이 범인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음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추격의 밤이 될 터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계속 숨바꼭질을 반복하며 상대의 압박을 그저 한줌 지푸라기와 같은 허약한 방패에 기대 견뎌야 할 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부림치며 나는 이 고통을 털어놓을 사람을 바랐다. 해결책은 이미 없었으니까. 하지만 놈은 나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아마 무난한 결말로 정리될 것이다(사실, 아직 완전히 끝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고통과 질환의 이야기는 어떨까?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태나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사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사태를 전달받는 방법을 이야기 외에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이나 의학의 지식조차 종종 일정한 서사의 틀을 통해 전달된다.
소설가이자 서사 이론가였던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유명한 비유를 빌리자면,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지만, “왕이 죽자, 그 슬픔에 빠져 왕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파편화된 사건에 인과관계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서사다.
우리에겐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당장 ‘나’ 이야기(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설명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세계’ 이야기(이 세계가 무엇이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넓이도, 폭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 조금 튀는 이야기가 있다. “고통 서사”로 분류되는 이야기들이다.
보통 병에 걸려 겪는 아픔에 대한 이야기인 이 고통 서사가 다른 이야기와 구분되는 이유는 고통의 특성과 우리가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먼저 고통은 참 다양하게 경험되지만, 그 다양한 경험을 말로 옮기려 하면, 표현은 놀랄 만큼 빈곤해진다. “아! 아프다!” 이 말의 결핍이 일단 고통 서사를 독특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통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그 ‘소유자’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그것은 어떤 이야기로 정리되는가? 예컨대 서두에서 내보였던 이야기는 일반적인 고통 서사는 아니다. 일부러 치통을 범죄 서사처럼 써본 것일 뿐이다. 반면 생각보다 고통 서사의 양식이 다양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고통과 질병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 그리고 그의 책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이다.
책에서 프랭크는 고통 서사를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복원 서사는 환자가 의학을 통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둘째, 혼돈 서사는 진단이나 치료가 불확실하거나 보장되지 않는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뒤섞인 이야기다. 셋째, 탐구 서사다. 프랭크 자신이 투병 경험을 통해 내보였던, 고통과 질병을 통해 겪는 자아에 대한 탐구를 정리하는 이야기다. 프랭크가 인정하듯 이것이 고통을 담는 모든 방식은 아니지만, 우리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이런 이야기로 정리된다.
문제는 사회뿐 아니라 의료 역시 복원 서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데 있다. 아픈 사람은 빨리 나아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기대받고, 의료 역시 낫게 해서 제자리로 돌려놓고 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을 본래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원될 수 없고,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제 많은 병이 만성질환, 또는 나았지만 얼마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생활과 환경의 문제에 기인함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아직도 많은 병은 그 끝을 예견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자아를 죽음의 위협으로 몰고 간다. 그때 우리는 혼돈 서사를,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분절되고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즉, 환자의 경험은 종종 복원 서사보다 혼돈 서사에 더 가깝다. 진단은 나왔지만 예후는 불분명하고, 치료는 시작됐지만 삶은 예전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때 환자의 말은 쉽게 정돈되지 못한다.
프랭크의 책이 가르치는 것은 질병의 해석학이면서 동시에 청자의 윤리다. 환자의 말이 정돈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 혼돈을 성급히 교정하지 않고 듣는 일. 그것이 좋은 의료의 출발점이라고 프랭크는 말하려 한다.
김준혁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김준혁 연세대 교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l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윤자형 옮김(2024),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