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익 계산하는 신자유주의, 인간관계까지 침투
정신건강 지상주의에 스트레스·갈등은 회피
20~30대 청년들, 가장 깊은 외로움 느껴
인간관계 역시 투자 대비 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신자유주의적 문화에서는 인간관계에서 오직 ‘무해성’을 추구하게 되고 이는 ‘손절 사회’로 이어진다. 클립아트코리아
‘정신과 의사가 알려주는 손절해야 하는 사람 유형 톱 3’, ‘이런 행동하는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마세요’, ‘엮이면 안 되는 독이 되는 사람 유형 1위’, ‘심리학자가 알려주는 인간관계 정리하는 법’, ‘당신이 유해한 친구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여덟가지 증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서 인기 있는 섬네일 문구들이다. 어쩌다가 관계의 주제가 ‘연결’이 아니라 ‘손절’이 되었을까?
‘손절사회’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된 ‘손절’ 문화의 배경과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해부하는 책이다. 저자는 “왜 청년 세대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다수가 외로움을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자발적인 단절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놓고, 심리학·사회학·대중문화 전반을 가로지르며 이 현상을 추적한다.
첫번째 원인은 전 영역에 걸친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확산이다. 무한 경쟁과 효율의 논리는 이제 경제를 넘어 문화이자 세계관으로 작동하고 있다.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 말처럼, “신자유주의는 존재의 모든 측면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독특한 통치 이성 형식”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관계 역시 투자 대비 의 경영자적 시선으로 평가된다. 정리나 거리 두기가 아닌 ‘손절’이라는 주식 투자 용어를 쓰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투자 대비 효과가 없으면, 과감히 정리하는 게 합리적 선택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동시에 인간관계에 쓸 시간과 에너지 자체를 빼앗는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더 많은 스펙을 쌓지만, 더 불안정한 일터에서 더 적은 실질 임금을 받고 일한다. 종신 고용은 사라졌고, 커리어 관리와 자기계발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인간관계에 쓰던 시간을 긁어서 자기계발에 써야 100살 시대의 생존이 보장될까 말까다. 연애, 결혼, 우정 등은 ‘사치재’가 됐다.
2000년대 초 실리콘밸리에서 이상적인 노동자상을 ‘제로 드래그’(zero drag)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로 드래그’는 일을 제외하곤 어떤 인간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가족에서 연인까지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 노동자를 뜻한다.
두번째 배경은 치료요법 문화, 즉 ‘치유문화’의 확산이다.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일상과 전반적인 문화를 설명하는 주요 틀이 되면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편과 갈등은 점점 병리화 됐다. 관계의 사소한 갈등과 스트레스도 트라우마, 가스라이팅, 에너지 뱀파이어 같은 개념으로 명명되며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곧 자존감과 건강의 증거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인간관계의 목적은 정서적 안정 유지로 수렴한다. 감정적 항상성과 심리적 안정이 삶의 목표이자 하나의 도덕처럼 자리 잡았다. 감정적으로 피로와 위협을 주는 것은 무조건 피하고 막아야 한다. ‘무해함’이 시대정신이 된 이유다.
학교 현장의 변화도 이를 보여준다. 교사의 훈계조차 아동학대 신고로 이어지고, 일부 학교에서는 졸업식 우수상 시상을 폐지하기도 한다. 상을 받지 못한 학생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항의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깊고 지속적인 관계보다 가볍게 연결되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관계를 선호하게 됐다. 취미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만나고, 감정적 부담이 생기면 조용히 관계를 정리한다. 남녀관계에서 ‘썸’만 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연애 관계가 지우는 책임과 헌신은 부담스럽다.
손절사회 l 이승연 지음, 어크로스, 2만1000원
그렇다면 이렇게 피곤한 관계는 정리하고 무해한 관계만 남긴 우리는 더 행복해졌을까. 결과는 그렇지 않다. 2024년 조사에서 한국 성인의 57%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특히 가장 깊은 외로움을 경험하는 집단은 노년층이 아니라 20~30대 청년층이었다. 25~39살 청년의 약 70%가 외로움을 호소했다. 친구가 없다고 느끼거나, 있더라도 평균적인 친구 수는 과거 세대에 비해 크게 줄었다.
이 변화는 ‘회피형 인간’의 부상으로도 이어졌다. 최근 심리학·사회학 연구는 젊은 세대일수록 갈등과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 인간관계 조사에서는 ‘상처받지 않는 것’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나타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회피형’이라는 표현이 일상어가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상정해 온 인간형의 등장과 맞닿아 있다. 늘 긍정적이고,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끊임없이 관리하는 인간. 이 같은 건강 지상주의는 거대한 소비 시장을 형성한다. 자기계발서, 건강식품, 고가 트레이닝 서비스, 보디 프로필, 명상과 요가, 필라테스 열풍까지 이어지는 웰니스 산업의 확장은 그 단적인 사례다. 자기관리라는 이름 아래 삶 전체가 관리 프로젝트로 전환된 셈이다.
책은 인간은 고통에 극도로 취약한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고통은 성찰을 요구하고 변화를 촉발한다. 삶은 기쁨과 슬픔, 고통과 회복, 고난과 성취가 어우러진 종합 서사다. 삶에서 슬픔과 고통, 고난만 깔끔하게 제거할 순 없다. 고통을 말끔히 제거한 진공상태의 인생을 삶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인간관계에서도 갈등은 관계가 깊어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공동체와 연결을 향한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며, 유대와 관계를 회피한 채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말처럼, “상처가 없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1998년생 사회학 연구자이다. 그는 청년의 삶, 소비주의, 건강 지상주의 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동시대의 풍경과 정서를 정면으로 읽어낸다. 놀라울 만큼 집요하고 날카로운 분석은 주목할 만한 신진 학자의 탄생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