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문질환 부르는 나쁜 습관…‘압력의 함정’ 피하려면
그래픽 | 김덕기 기자 hajuk932@kyunghyang.com
직장인 최모씨(39)는 한 달 전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뒤처리를 하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6년 전 아이를 임신했을 때 심했던 항문 주변 치핵 덩어리가 다시 튀어나온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임신의 영향으로 변비가 계속되면서 치핵이 만져질 정도였으나 출산 후 차츰 상태가 나아져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씨는 “출근길에 급한 신호가 올까 걱정돼서 미리 배변을 끝내려고 화장실에서 오래 힘을 주고 있었던 게 화근”이라며 “의사에게 절대 스마트폰 들고 화장실 가지 말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흔히 치질이라고 통칭하는 치핵, 치열, 치루, 항문 농양 등 항문 질환을 두고 전문가들은 문명화된 생활이 만든 ‘압력의 함정’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 항문 주변에는 배변활동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혈관과 근육 등이 일종의 ‘쿠션’ 역할을 하는 조직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과도한 압력을 집중하는 습관이 장기간 이어지면 구조와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변비·설사는 물론 스마트폰이나 신문을 보며 변기에 오래 앉아있는 습관도 주변 조직에 혈액이 고인 상태를 지속시켜 병변이 비정상적으로 부어오르거나 아래로 삐져나오게 만든다.
장시간 앉는 습관·음주 등이 원인
항문 정맥은 혈액 정체되기 쉬워
과도한 압력 지속 땐 치핵 등 발생
배변에 걸리는 시간 ‘5분 이내’로
앉았다 서는 운동·좌욕 등 ‘도움’
치질이라 불리는 질환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치핵은 항문 점막 주위의 돌출된 혈관 덩어리를 말한다. 치핵은 발생 부위에 따라 항문 안에 생기면 내치핵, 밖이면 외치핵으로 나뉜다. 항문의 점막이 찢어지는 치열이나, 항문의 염증으로 구멍(누공)이 발생한 치루는 치핵과 구별되는 질환이지만 원활하지 않은 배변활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다. 배병구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외과센터장은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면서 중력의 영향으로 혈액이 아래로 쏠리는 구조적 한계를 갖게 됐다”며 “항문 정맥은 다리 정맥과 달리 역류를 막는 판막이 없어 선천적으로 혈액이 정체되기 쉬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치핵과 치열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는 배변 시 과도한 힘을 주거나 장시간 변기에 앉아있는 습관 외에도 음주와 설사, 변비 등이 꼽힌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호르몬의 작용과 원활하지 않은 혈액순환 때문에 치핵이 생기기도 한다. 반면 치루는 젊은 남성에게 비교적 발생 빈도가 높은 경향을 보이는데, 여성보다 항문 주변에 있는 항문샘이 깊고 괄약근이 강해 이물질이 끼기 쉬운 구조 때문이다. 원활한 배변을 위해 윤활작용을 하는 분비물을 내보내는 항문샘이 세균에 감염되면 항문 농양이 생기고, 이곳이 터져 항문 안팎으로 뚫린 구멍이 생기면 치루가 된다. 대체적으로 항문 농양이 생긴 환자의 70% 정도는 치루를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질이라고 무조건 수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혈관이 붓고 돌출된 정도가 약한 치핵, 파열 정도가 심하지 않은 치열, 염증 부위가 크지 않은 항문 농양은 치료제를 먹고 생활습관을 교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낫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치핵이 악화되면서 혈관 덩어리가 커지고 배변 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통증이 심하거나, 항문 속 고름(농양) 주머니가 커져 터지는 치루가 심해지면 수술이 필요하다.
특히 치루 중에서도 괄약근을 침범한 범위가 깊고 넓은 복잡 치루는 치료도 더 어렵다. 항문 안과 바깥에 여러 개의 구멍(누관)이 뚫린 셈이라 괄약근에 있는 일차적인 병의 원인을 제거하고 이들 누관을 처리해야 한다. 이때 가능하면 괄약근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술법이 시도된다. 실이나 탄성밴드 등으로 괄약근을 동여매고 절개하는 ‘치루 절개술’, 치루관을 통해 고무줄을 넣어 올가미처럼 묶어 두는 ‘시톤(seton)’, 치루가 생긴 누관을 묶어서 대변이 괄약근까지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아 치루를 낫게 하는 ‘괄약근간 누관 결찰술’ 등의 방법이 환자의 상태에 맞게 적용된다.
윤순석 고려대 안산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치루는 뚜렷한 예방 수단이 없어 조기 발견을 통한 치료가 가장 바람직하므로 관련 증상을 보일 때에는 즉시 병원을 찾는 게 좋다”며 “특히 복잡 치루는 발병 형태가 매우 다양해 정교한 계획 수립과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는 만큼 전문의와 충분히 상담한 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항문을 지키려면 오래 앉아있지 말고 자주 일어나는 것이 좋다. 배변 시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무를 보거나 공부를 할 때도 오래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면 혈류가 정체되면서 항문에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가볍게 앉았다 일어나는 ‘스쾃’ 동작으로 하체를 움직여 근육을 통한 혈류의 펌프 기능이 원활해지면 항문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며 장시간 변기에 앉아있는 습관은 반드시 피하고 가능하면 배변에 소요되는 시간을 5분 이내로 하는 ‘5분 원칙’을 지켜야 한다. 비록 잔변감이 있어 바로 일어서기가 찝찝하더라도 일단 용변을 마친 뒤 변의가 느껴질 때 다시 화장실로 가는 것이 좋다. 따뜻한 물에 항문 주변을 담그는 좌욕도 도움이 된다.
만성적인 음주 역시 치질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술이 직접 치질을 만든다기보다는 간 기능 저하와 간을 지나는 혈관의 압력 상승 등을 통해 정맥을 돌게 하는 압력체계를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변비·설사 등으로 순간적인 복압이 가해지면 ‘항문 쿠션’이 훨씬 쉽게 손상될 수 있다. 배병구 센터장은 “항문질환을 제대로 제어하려면 5분 원칙과 함께 주기적 미니 스쾃, 좌욕 등 생활 교정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며 “압력의 함정을 인식하고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 장기적인 재발 예방의 핵심”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