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부품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전방산업인 완성차 업계가 미래 성장 전략을 전동화와 내연기관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부품업체들도 덩달아 헤매는 모습이다. 중동전쟁이라는 악재까지 터져 비용 상승 압박이 거세지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둔화 우려로 제품 가격을 올리지 않는 완성차 제조사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형국이다.
자동차 부품업계 한 관계자는 29일 “이 갈수록 쪼그라드는 추세”라며 “완성차 업체들이 해외 생산을 늘리면서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데다, 장기거래 관행에서 벗어나 단가 인하 경쟁을 유도한 후 새로운 계약을 맺는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차, 2차, 3차 협력사로 내려갈수록 사정은 더 열악하다. 업계에서 “완성차가 기침하면 부품업체들은 몸살을 앓는다”는 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부품업체들은 당면한 복합위기를 헤쳐가기 위해 자구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현대트랜시스는 자동차가 이동수단을 넘어 생활공간으로 진화하는 흐름에 발맞춰 시트 성능 고도화에 매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트랜시스 주력 사업은 변속기와 시트다. 매출 비중은 각각 60%와 40% 수준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여서 현대차와 기아라는 탄탄한 납품처가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어 상황이 다소 나은 편이지만, 회사의 한 축인 다단 변속기(엔진 힘을 상황에 맞게 바퀴로 전달하는 장치)가 언젠가 도래할 전기차 시대엔 축소되거나 사라질 부품이라는 점에서 마냥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다.
현대트랜시스 친환경 시트를 적용한 미래차의 콘셉트 이미지. 현대트랜시스 제공
잇단 악재에 쪼그라들어도
‘납품 끊길라’ 완성차 눈치보기만
1차·2차·3차 협력사 사정 더 열악
시트 성능 고도화·감속기 전환
로봇 분야까지 사업 넓히는 등
전기차 시대 자구책 마련 안간힘
현대트랜시스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수요 둔화)으로 하이브리드차 수요가 늘면서 일정 부분 시간을 벌게 된 점은 긍정적”이라면서도 “기존 내연기관 변속기 중심 사업을 전기차용 감속기로 전환하는 한편 자율주행 시대에 중요성이 커지는 시트 기술 개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소비자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새 차 냄새를 유발하는 시트의 화학성분과 유해물질을 줄이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현대트랜시스는 2030년까지 시트 화학섬유를 천연섬유로 30%까지 대체할 원단을 개발한다는 목표다.
국제 환경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천연 추출 소재와 재활용 소재 등을 사용해 시트를 제작하는 자연 친화 기술 개발에도 역량을 쏟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 등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시트 납품처를 다변화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이규복 현대글로비스 대표는 지난 26일 서울 성동구 본사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전 사업 부문에서 자산 기반 경쟁력 강화와 비계열 사업 확대라는 전략 방향을 일관되게 추진할 것”이라며 중국 현지 완성차 업체와 전략적 협업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완성차 회사들은 현재 전기차를 넘어 로봇·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자율주행·미래항공교통(AAM)·드론 등을 아우르는 종합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독일 폭스바겐그룹이 한 자동차 공장을 이스라엘 미사일 방공체계 ‘아이언돔’ 구성 요소들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라파엘 어드밴스드 디펜스 시스템스와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라파엘은 아이언돔을 생산하는 이스라엘 국영 방산업체다. 양사의 이번 협력은 중국과의 경쟁 심화와 전기차 전환 지연으로 성이 급감한 독일 자동차 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는 방위산업과의 협업을 모색하는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 FT는 분석했다.
이들을 고객사로 둔 부품업체들도 급물살에 올라타고 있다.
차량 구동 부품 생산업체 서진오토모티브는 로봇 하드웨어와 구동부·센서 제조 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2차전지 부품·소재 분야도 사업 목적에 추가했다. 종전에 정밀 부품을 만들면서 쌓았던 제작 능력을 자동차에만 쏟지 않고 로봇 분야로 돌리겠다는 취지다.
자동차 모터 부품과 플라스틱 사출 제품을 생산하는 유니테크노도 로봇 장치용 부품 제작과 연구·개발(R&D) 업무를 신규 사업 목록에 올리고 물류 공장 등에 투입되는 자율 이동로봇의 액추에이터(관절) 분야 등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 중이다. 내연기관차 중심에서 전기차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부품업체들이 로봇으로까지 발을 뻗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급류에 밀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다.
현실은 첩첩산중이다. 하루아침에 체질을 개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영세한 규모의 자동차 부품업체일수록 더욱 그렇다.
최근 발생한 대전 안전공업 화재 참사에서도 이런 상황은 여실히 드러났다. 사고 업체는 현대차·기아의 안전밸브 핵심 공급사(1차 협력사)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지만 실내에 유증기가 떠다니는 등 작업 환경은 열악했다. 천장 덕트에 기름때가 잔뜩 끼어 있을 정도로 화재 위험에도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었다.
자동차 부품 공장 작업자들은 “납품 기한에 맞춰 작업하려면 낡은 시설 문제를 발견해도 공정을 멈추고 대대적인 정비에 착수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토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동전쟁 발발에 따른 에틸렌 공급 차질은 자동차 산업 전반에 직접적인 타격을 예고하고 있다. 에틸렌을 중합해 만든 다양한 플라스틱과 합성고무(폴리머)는 자동차 내외장재 전반에 핵심 소재로 광범위하게 쓰인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자문위원은 “국내 부품업체들은 전동화 시대를 이끌 R&D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현대차그룹이 핵심 인력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테슬라 등 글로벌 빅테크들까지 고급 인재 채용에 가세하면서 부품업계의 앞날을 더 어둡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이택성 이사장은 “해외에서는 국가별로 전동화 정책 흐름이 다르게 나타나고, 국내에서는 중동전쟁 장기화 우려에 따른 가격 인상 압박과 소비 둔화 우려에, 화재 사고까지 터져 그야말로 동시다발 악재가 겹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안전한 작업 환경 구축은 물론이고 사업 다각화와 미래차 전환에 이르기까지 당면 과제를 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업계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부 차원에서도 전폭적인 관심과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힘써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