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간송미술관 ‘추사의 그림수업’에 전시된 김정희의 <예림갑을록>(앞)과 8명의 화가가 그린 ‘팔인수묵산수도’.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1849년,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 제주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당대에도 명망이 높던 김정희를 흠모한 14명이 자신의 글씨와 그림을 김정희에게 선보였고, 김정희는 그들에게 평가를 남겼다.
김정희가 쓴 <예림갑을록>(1849)과 화가 8명이 각기 비단에 그린 ‘팔인수묵산수도’(1849)는 그때의 기록이다. 김정희가 신뢰한 제자 허련, 흥선대원군의 측근이 된 유재소, 그림을 관장하던 관청 ‘도화서’의 화원 이한철·박인석·유숙·조중묵, 여항문인이자 서화가이던 전기, 조선 말 이색적인 화풍을 개척한 김수철이 각자 산과 물을 그렸다. 각 그림에는 김정희가 남긴 날카로운 감상평이 적혀 있다. ‘추사의 그림수업’이 열린 것이다. 이는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오는 7일 개막하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대구간송미술관 ‘추사의 그림수업’에 전시된 김정희의 ‘세한도’(1844).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김정희는 그의 호를 딴 글씨체 ‘추사체’로 유명한 명필가이면서,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 ‘세한도’(1844)를 남긴 명화가였다. 김정희가 1840년부터 제주에 위리안치(죄인을 가시 울타리 안에 가둠)를 10년 가까이 당했는데도, 임금의 어진을 그리던 도화서 화원들까지도 자신의 그림을 김정희에게 평가받길 원했다.
<예림갑을록>에서의 모임을 누가 주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김정희가 8명의 화가에게 각자 남긴 감상평은 남아 있다. ‘팔인수묵산수도’의 각 그림마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더한 발문 일부에는 <예림갑을록> 속 김정희의 감상평이 인용돼 있다. 이를 근거로 <예림갑을록>의 평가 대상 중 하나가 ‘팔인수묵산수도’로 여겨지고 있다. 오세창의 아버지인 오경석은 유명한 그림 수집가이자 김정희의 제자였다.
김정희의 <예림갑을록>에 전기가 쓴 서문. 대구 | 윤승민 기자
김정희의 감상평은 직설적이다. 이한철에게는 “붓놀림이 구차하지 않고, 경치의 구상 또한 훌륭하다”고 했고, 허련에게는 “필의에 메마르고 껄끄러움이 없으니 기뻐할 만하다”고 했다. 반면 조중묵에게는 “네 그루 나무의 배치는 변화하고 생동하는 뜻이 없다”고 지적했고, 박인석에게는 “이 그림에는 전혀 변화무쌍한 뜻이 없다”고 했다.
감상평을 통해 김정희가 추구하는 회화관을 짐작해볼 수 있다. 김정희는 전기에게 “자못 원나라 화가의 풍치를 갖췄다”고 했고, 유재소에게는 원나라 화가 황공망과 예찬을 배우라고 했다. 사실주의 회화가 융성했던 중국 송나라 이후 세워진 원나라에서는 적은 선으로 핵심적인 표현만 남긴 문인화를 추구했다. 함께 전시되는 허련의 <소치실록>(1867)에는 김정희가 허련에게 “정겸재(정선)와 심현재(심사정)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결코 들추어보지 않도록 하게”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다. 18세기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이 남긴 그림보다는 전통 문인화를 추구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김정희는 1851년 함경도 북청으로 1년 정도의 유배를 다녀온 뒤 1856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김정희에게 평가를 받은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예술을 꽃피웠다. 김정희의 오랜 제자였던 허련은 김정희의 화풍을 비교적 충실히 재현했지만, 조중묵이나 김수철은 수묵화를 기초로 다양한 표현과 색을 더했다. 도화서 화원들은 문인들이 그리던 간결한 수묵화보다는 더 다양한 선과 복잡한 구조를 추가했다.
이한철이 6폭 병풍에 그린 ‘매화서옥도’(19세기 말). 대구 | 윤승민 기자
전시 막바지에는 19세기 조선 화단에서 유행한 각자의 매화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이한철이 너비 2m인 6폭 병풍에 그린 ‘매화서옥도’(19세기 말)는 꿈틀대듯 꺾어진 매화나무 가지부터 가옥의 살림살이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 반면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최초 공개되는 조중묵의 ‘승주심매’(19세기)는 먹의 농도를 달리해 안개 낀 강변의 매화 숲을 자연스럽게 묘사했다.
총 47건 67점의 유물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에는, 세한도를 포함한 추사의 대표 회화 7점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세한도는 개막과 함께 공개된 후 다음달 10일까지 전시된다. 다음달 12일부터는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난맹첩>이, 6월2일부터는 또다른 보물 ‘불이선란도’가 각각 폐막일인 7월5일까지 공개된다. 관람료 성인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