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 왕건의 ‘인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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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992년 북한의 개성 현릉(왕건릉) 옆에서 발굴된 왕건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삼한 통합의 위업을 달성한 지 7년
왕위 26년에 67년 삶을 마친 왕건
임금의 ‘고명’으로 사후 혼란 막아
업적을 ‘신비화’하려는 욕망 절제
바른 정치를 위한 기록자의 ‘의지’
조작된 이미지와 욕망이 난무하는
오늘 한국의 정치문화에도 거울로
943년 음력 5월29일, 양력으로는 7월4일. 아마도 장마의 찐득한 습기와 후텁지근함이 공존했을 그날, 임금이 태자, 종실, 신료들이 모여 있는 개경 궁궐의 신덕전에 나온다. 병색이 완연한 그는 훗날 왕조의 시조로 추앙받으며 태조라는 묘호를 받게 될 왕건이다.
모두가 임금의 죽음을 예견하던 자리, 왕건이 학사 김악에게 남길 말을 불러주며 유조의 초고를 작성하게 했다. 임금이 힘겹게 내뱉는 한마디와 종이에 소맷자락을 스치며 붓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오는 전각. 잠시 후 김악이 붓을 멈추고 임금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돌아가신 것인가! 숨죽이며 김악의 붓끝만 바라보던 신료들이 일제히 목 놓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힘겨운 작은 목소리로 왕건이 물었다.
“성상께서 백성의 부모가 되셨거늘, 오늘 이렇게 저희를 버리려고 하시니 저희가 애통함을 절로 이길 수가 없을 뿐입니다.” 신하들이 울부짖기를 멈추고 이렇게 대답했다.
왕건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인생이란 예로부터 덧없는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67년의 삶을 마쳤다. 왕위에 있은 지는 26년, 신라·후백제를 복속하며 삼한 통합의 위업을 달성한 지 7년 만이었다.
<고려사>는 조선 전기 김종서·정인지·이선제 등이 왕명으로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고려사>에 실려 있는 태조 왕건의 마지막 모습이다.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약간 각색하기는 했으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간 대화는 사료에 실린 내용 그대로다. 임금이 정전에 나와 유언을 불러주었는데, 중간에 죽은 줄로 착각한 신하들이 통곡하자 그 소리에 놀란 임금이 ‘인생이 원래 덧없는 거지’라고 하고 죽었다는 내용. 이 자체만 보면 별 색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임금이 남겼다는 마지막 말은 요즘도 흔히 하는 얘기여서 별 감흥이 생기지 않으며, 임금의 죽음을 착각하고 통곡한 신하들의 모습은 약간 블랙코미디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 장면 하나에서도 많은 함의를 찾아낼 수 있다.
정침(正寢)에서 맞이하는 죽음
임금은 죽을 때 아무 데서나 죽으면 안 된다. 아녀자의 품에서 죽어서도 안 되며, 소수만 모인 데에서 죽어서도 안 된다. 그의 죽음은 후계 구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유교 경전인 <상서>의 ‘고명’ 편에서는 임금이 죽을 때 태자를 비롯해 주요 대신과 제후들이 모두 참여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는 권력이 잘못 계승되거나 사달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죽을 때 정침으로 나와 후계자와 대신 등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마지막 말을 남겨야 한다. 이때 정침이 무엇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으나, 임금이 쉬고 잠자는 침전이라기보다는 정사를 보는 편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의례를 규정한 <국조오례의>에서는 사정전에서 임금이 마지막 말(고명)을 남겨야 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전은 정사를 보는 경복궁의 편전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문제가 되거나 위기를 초래할 뻔한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당장 태조 왕건의 아들 혜종 대가 그러했다. 혜종은 왕규의 침입 이후 의심이 많아져 신하들과의 접촉을 꺼리고 소수의 인원만을 곁에 두었다.
결국 혜종은 분명한 왕위계승의 방향을 전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신하들은 혜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동생인 정종을 추대했다.
조선의 명종이 죽을 당시에도 비슷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들이 없던 명종은 세자를 미처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병세가 깊어지며 인사불성에 빠졌다.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명종의 임종 즈음에 대신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해 이렇게 강하게 비판한다. “어제 상이 위독하여 인사를 살피지 못한다는 점을 승정원에서 이미 알고 있었으니, 승정원에서 바로 아뢰어서 대신이 입시하게 했다면 유언을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일하게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 만약 이준경(영의정)은 집에 물러가 자고, 심통원(영중추부사)이 홀로 들어와 중궁에게 명을 받았더라면 유명(遺命)을 올바로 받을 수 있었겠는가? 대계(후계를 세우는 계획)가 을축년에 이미 정해져 있어 그나마 별다른 염려가 없었지만, 만약 유명을 따라 임금을 세우는 일이 심통원의 손에서 나왔더라면 후일에 스스로 공신이 되어 사림의 화를 빚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명종 22년 6월28일(신해))
권력계승 과정에서는 언제나 틈이 있기 마련. 민주공화정인 지금은 ‘레임덕’이라는, 조금은 느슨하면서도 태평한 단어로 표현되지만, 왕조 사회에서 국왕의 죽음은 왕조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왕의 죽음은 철저히 공적이어야 했다. 고려의 태조는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안온한 침상이 아니라 예복을 차려입고 대신들이 모인 편전에 나와야 했고, 조선의 명종은 이미 신음만 지르며 말도 못하는 상태에도 내시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 앉아 대신들을 접견해야 했다. 혈통으로 전수되는 권력에는 늘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의 모습.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태조의 마지막 말에 담긴 역사성
‘인생은 원래 덧없는 것’이라는 태조의 마지막 말. 사실 왕조의 첫 임금이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지금 우리도 가끔 하는 말이 아니던가? 이렇게 범박한 문장을, 인생 마지막에 남기다니 임금쯤 돼도 결국 인생은 거기서 거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이 기사를 음미해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 장면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고려사>의 기록 전반이 그다지 자세하지 않은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한 의문을 지우기 힘들다. 이 소소한 대화의 장면은 어떤 점에서 중요했던 것일까?
태조가 신하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는 그가 제 죽음을 담담히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통곡하는 신하들에게 결국 인간이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설파한 셈이다. 하지만 과연 이 발언이 943년 당시에도 평범하게 받아들여졌을까? 죽음 앞에 순응하며 자신 또한 덧없는 생을 살다 가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태도는, 당대 군주의 위상을 고려할 때 되레 특별한 것이었다. 당장 왕건이 쫓아낸 궁예를 생각해보라. 궁예는 자신이 미륵이라고 주장하며 머리에는 금색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다. 두 아들은 보살이라 칭하고, 스스로 경전까지 지으며 설법을 하기도 했다. 이 시대 각처에서 성장한 호족들은 자신의 조상을 성황신이나 산신으로 모시며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후대에 자기 지역의 신이 되기도 했다. 왕건 역시 그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조 왕건이 ‘합리적 방법’에만 기반한 것은 아니다. 권력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그 역시 군주의 권위를 보장해줄 강렬한 상징물을 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신물(神物)인 오래된 거울과 성제대였다. 오래된 거울은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신비로운 사람에게서 사들인 것이다. 거기에는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렸다”는 말로 시작하는, 모호하고 은유적인 표현이 담겨 있었는데, 이것이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업을 열 것이라는 예언으로 해석됐다.
이 예언이 새겨진 옛 거울은 왕건이 주변인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치기로 결심할 때 중요한 징조로 활용된다.
오래된 거울이 하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성제대는 신라의 정통성을 승계했다는 상징이었다. 성제대는 ‘천사옥대’(하늘이 내려준 옥띠)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진평왕이 즉위할 때 하늘의 상제가 사신을 내려보내 준 것이다. 황룡사의 장육존상 및 구층탑과 함께 신라의 삼보로 꼽히던 신물, 경순왕은 고려에 귀부하며 이 옥대를 바친다. 이는 경순왕이 알아서 바친 것이 아니라, 왕건이 먼저 신라를 은근히 압박하며 요청했던 것이다. 그는 신라의 사신에게 당신 나라는 삼보가 있으면 나라를 잃지 않는다던데, 황룡사는 알겠으나 성제대는 어디 있냐고 콕 집어 물었다. 그 사신이 후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구원병을 요청하러 온 것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저 질문의 저의와 압박의 정도가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권력이 이성적 권위만으로 바로 서지 못할 때, 통치자는 흔히 초월성이나 신성성의 힘을 빌린다. 왕건은 신비주의를 동원하려는 욕망을 자제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인간임을 담담히 선언했다. 장례 역시 검소하게 치르라고 당부하며 신격화를 거부하고 권력자의 도덕적 의무를 중시했다. <고려사>에 비중 있게 기록된 그의 임종 장면은, 이러한 정치문화를 지녔음을 강조하려던 기록자의 의지였으리라. 오늘날에는 미디어가 정교하게 가공한 이미지와 대중의 욕망을 파고드는 서사들이 성제대와 옛 거울 같은 허구적 상징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허구적 장면들을 헤치고, 바람직한 정치문화를 떠올리며 우리가 강조해서 기록해야 할 장면은 무엇일까?